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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전치형, 과학의 언저리] 태블릿

등록 2016-11-17 18:25수정 2016-11-17 20:42

최순실씨의 태블릿 컴퓨터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건드리듯 간단히 권력을 사유화하고 이익을 챙긴 사건의 상징이 되었다. 그 태블릿에는 스스로 믿지도 않는 공허한 말로 쓴 파일들이 가득했다. 그것들을 없앤 다음 우리가 앞으로 읽어야 할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사람들의 태블릿이다. 이 땅의 서판에 한 글자씩 눌러 새기는 묵직하고 치열한 말들이다. 민주주의의 언어다.
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2010년 1월 스티브 잡스는 태블릿 컴퓨터 아이패드를 “마술적이고 혁명적인 기기”라고 처음 소개했다. 애플의 보도자료는 아이패드에서 인터넷을 쓰는 일이 “놀랄 만큼 더 쌍방향적이고 친밀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라고 홍보했다. 큰 화면과 매끄러운 키보드가 있어서 “즐겁고 쉽게” 이메일을 읽고 쓸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영국 신문 <가디언>은 아이패드가 출시되었을 때 이것이 과연 “읽기 혁명”을 일으킬 것인지 물었다. 아이패드 같은 태블릿 컴퓨터가 스마트폰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은 책이나 문서를 읽기에 더 편하다는 점이었다. 태블릿은 글을 쓰고, 편집하고, 읽는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기회와 자극이었다.

그러므로 지난 10월21일 이원종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최순실씨가 대통령 연설문 작성에 관여하는 것이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반박하는 대신, 최씨가 봉건시대에는 없었던 방식으로 연설문을 검토했다고 설명했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비서들과 최순실씨 사이에서 권력은 태블릿을 통해 흘렀다. 직접 만나 문서를 건네받을 필요 없이, 언제 어디서나 손가락 터치 한 번이면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 같은 연설문이 최순실씨의 갤럭시탭 화면에 떴다. 최순실씨는 자신의 태블릿 화면을 ‘잠금 해제’하는 것만큼 손쉽게 대통령 문서의 잠금장치를 열 수 있었다. 그 문서들을 지키라고 있는 청와대 보안 네트워크와 조직이 오히려 파일 유출을 돕거나 못 본 체했다. “놀랄 만큼 더 쌍방향적이고 친밀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태블릿의 장점을 최대로 살린 청와대 문서 읽기의 혁명이었다.

태블릿으로 쓱쓱 넘겨 보며 연설문을 검토하는 새로운 기술이 대통령의 말과 실제 사이의 간극을 덮어주지는 못했다. 제이티비시(JTBC) 뉴스가 공개한 최순실씨 태블릿 속의 대통령 연설문 파일은 이런 구절들을 담고 있었다. “국민 여러분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 국민 대통합을 이루고, 민생을 챙겨서 국민 모두가 행복한 100%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 저의 소망이자 꿈입니다.”(대통령 당선자 신년사 재수정본). “저는 영령들께서 남기신 고귀한 뜻을 받들어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 것이 그 희생과 아픔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제33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사) “인류의 역사는 정의와 평화를 향해 도도하게 전진해온 위대한 진보의 역사입니다. 독일이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서 위대한 진보를 선도했듯이, 인류의 위대한 또 하나의 진보는 동쪽 끝 한반도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 붉은색 표시). 이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진 말들이다. 이 말들은 태블릿 화면을 따라 미끄러지고 흩어져서 어디에도 뿌리를 내릴 수 없게 되었다.

아이패드나 갤럭시탭 같은 기기가 등장하기 오래전에 ‘태블릿’이란 단어는 흙을 다지거나 나무에 왁스를 입혀 글을 쓸 수 있게 만든 서판을 뜻했다. 돌이나 금속으로 작은 판 모양을 만들어 문자와 그림을 새길 수 있도록 한 것도 태블릿이라고 불렀다. 기록하고 돌려보기 위한 판이었다. 당시의 중요한 이야기를 새긴 태블릿들이 모여 시간을 견디면 역사가 되었다.

최순실씨의 태블릿 속에 담긴 것들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한동안 잊고 있던 오래된 태블릿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오늘의 중요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혼자서도 쓰고 여럿이 모여서도 쓴다. 쓴다기보다는 새긴다고 해야 할 것이다. 강원도 북원여고 3학년 학생은 “저희가 앞으로 물려받을 민주주의를 더럽히지 말아 주세요”라는 요구를 대자보에 새겼다. 대구와 광주의 가톨릭대학교 신학생들은 “민주주의의 소생을 위해 시대의 분노와 절망을 품고 가겠다”는 다짐을 시국선언에 새겼다. 세월호 가족들은 그동안 “존재하지 않는 국가의 구조”를 기다렸다는 절망과 함께 진상 규명의 의지를 또 새겼다. 이 태블릿들이 모여 역사가 될 것이다.

최순실씨의 태블릿 컴퓨터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건드리듯 간단히 권력을 사유화하고 이익을 챙긴 사건의 상징이 되었다. 그 태블릿에는 스스로 믿지도 않는 공허한 말로 쓴 파일들이 가득했다. 그것들을 없앤 다음 우리가 앞으로 읽어야 할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사람들의 태블릿이다. 이 땅의 서판에 한 글자씩 눌러 새기는 묵직하고 치열한 말들이다. 민주주의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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