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기획자 김기춘이 구속됐다. 맞다. 그 김기춘. 이제 이 나라에서 그의 이름은 고유명사라기보다 전해져 내려오는 사회적 악의 한 상징이다. 평생 남에게 수갑만 채운 사람이었는데 드디어 본인이 수갑을 찼다. 어떤 이는 기분 꿀꿀할 때 그거 보고 힘내겠다며 수갑 찬 사진을 저장한다. 안도현 시인이 사람들의 마음을 깔끔하게 대변했다. “참 미안한 말이지만 김기춘은 박정희 이후 자신이 조작해서 구속시킨 억울한 사람들의 형량을 합친 것만큼만 교도소 생활을 하기 바란다.” 악담도 이런 악담이 없다. 그가 구속시킨 억울한 사람들의 형량만큼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면 살아서 햇빛을 보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살아서는 교도소 밖을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절규하는 이도 있다. 김기춘이 간첩으로 몰아서 고문당한 끝에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이다. 얼마 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삶이 이미 다 망가졌는데 한이 풀릴 리 없다. 동료들과 회식에서 김기춘 구속을 축하하는 축하주를 들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서도 뒤돌아서면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군중심리인가. 내가 모진 인간인가. 다 아니다. 제대로 된 분노다. 사람들은 남의 개인적 불행에 고소해하는 자신을 어색해한다. 안도현 시인도 그 짧은 글에서 ‘참 미안한 말이지만’이라고 썼다. 신실한 신앙인으로, 자상한 남편으로, 믿을 만한 선배로 김기춘의 개인적 정체성은 나무랄 데 없을지 모른다. 평균 이상일 수도 있다. 문제는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 개인적 영역에서 김기춘처럼 소박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던 누군가의 일상을 싹수부터 깡그리 짓밟았다는 것이다. 씻을 수 없는 죄다. 언제 적 김기춘인데 얼마 전까지도 그 짓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의 권력 악행으로 인한 직접적 피해자뿐 아니라 그 시대를 함께 살아온 이들은 증오에 가까운 감정까지 갖는다. 나도 그렇다. 증오는 인간이 인간에게 품을 수 있는 극단의 악감정이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에게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갖게 되면 본인도 당황한다. 내가 이렇게까지 나쁜 인간인가. 바닥까지 추락하는구나 싶어 찜찜하다. 그러나 생각과 행동은 다르다, 별개다. 모든 생각은 무죄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모든 생각은 무죄다. 아는 이가 그랬다. “김기춘은 더 이상 고통스러울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당하다 죽어서 지옥불에 떨어져야 한다. 죽는 순간까지 그리고 죽어서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꼭 알아야 한다.” 끄덕였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랄 필요 없다. 단지 어떤 생각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를 힐책하거나 이중적이라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 나라는 마음껏 분노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억눌렀고 억눌렸다. 그 결과 온갖 것이 은폐되고 뒤틀려 버렸다. 전두환 같은 인간을 단죄하지 못하는 일에서조차 마음껏 분노하지 못했다. 그렇게 살았다. 제대로 분노하는 법조차 거세당했다. 그러다 광장에서 촛불을 통해 제대로 분노하고 마음껏 분노하는 감각을 되찾았다. 전두환을 지금이라도 단죄한다면 팔순의 노인 전두환에게는 불행이다. 하지만 사회적 영역에선 정의의 구현이 확실하다. 김기춘들의 구속 또한 그렇다. 사회 전체가 분노로 가득 차면 어떡하느냐고 혀 차며 걱정할 거 없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 제대로 분노해야 정상적인 일상이 오고 평화도 온다. 불로 태우듯 분노를 다 털어내야 제대로 된 에너지가 생긴다. 제대로 분노하라. 마음껏 분노하라. 그래도 괜찮다. 그래야 새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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