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지난해부터 몇 회에 걸쳐 나는 이 칼럼난에서 트럼프 대통령 탄생이라는 ‘악몽’의 예조(豫兆)에 대해 얘기했다. 그것이 지금은 ‘예조’가 아니라 현실이 돼버렸다. 평소 무슨 일이든 비관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 나지만, 지난해 11월의 미국 대통령선거 개표 때까지 “설마” “아무리 그렇기로서니”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릴 순 없었다. 인종차별주의자인 그는 그 본성을 감춘 게 아니라 가장 천박한 어투로 노골적으로 그것을 드러냈다. 그것이 마이너스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플러스가 돼 지지율을 높였다. “설마” 했던 나는 자신의 ‘이성’과 ‘상식’에 배반당한 꼴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는 선거전 유세 중에 장애 때문에 신체가 부자유스러운 저널리스트의 동작을 흉내내면서 비웃었다. 나중에 여배우 메릴 스트립이 골든 글로브상 수상식(1월8일)에서 그것을 비판한 것은 정말 훌륭했다. 스트립은 말했다. “이런 충동적인 모욕을 공개 무대에서 권력을 쥔 인물이 가하면 그건 모든 사람들 생활 속으로 침투합니다. 왜냐하면, 그건 다른 사람들도 그런 짓을 해도 좋다는 일종의 허가증을 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멸은 경멸을 부르고 폭력은 폭력을 부릅니다.”
예전의 내 상식으로는, 장애인을 조롱한 그 일 하나만으로도 트럼프가 사임에 내몰린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트럼프는 오히려 스트립을 “할리우드에서 가장 과대평가되고 있는 여배우”라고 욕을 하면서 “힐러리 클린턴의 하녀”라고 야유했다.
이런 짓을 보면서 대다수가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수의 일반인들이 그저 즐거워하거나 오히려 트럼프 지지로 기운 듯하다. 일본의 ‘중립 시늉’을 하는 ‘지식인’ 중에도 스트립과 같은 ‘엘리트’의 ‘지적’인 말투야말로 ‘대중’의 반발을 사는 법이라고 해설하며 득의양양한 자가 있다. 나는 이런 ‘해설’을 경멸한다.
천박하고 비인간적인 말은 누가 하든 단호하게 거부당해 마땅하다. ‘엘리트 대 대중’이라는 구도는 천박하고 악의적인 설정이다. 이 구도에는 ‘대중’은 지적이지 못하고 자신의 충동적인 욕망에만 충실하며, ‘엘리트’들의 ‘지적’ 비판은 현실정치에서 무기력하다는 (아마도 의도적인) 편견이 작용하고 있다. 이는 언제나 권력자들에게 유리하다. 거기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여기서 ‘대중’이라 일컫는 존재는 인종적, 성적 차별의식을 내면화한 백인층이다. ‘대중’ 속에는 진보적인 백인층도 있고, 배척의 표적이 돼 있는 이민·난민·소수민족·여성·장애인 등도 물론 있다.
실제로 이른바 ‘엘리트’ 중에 타기해야 할 차별자나 파시스트도 있듯이, 이른바 ‘대중’ 속에는 ‘관용’ ‘연대’ ‘공감’이라는 미덕을 자연스레 실천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분단선은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관용’과 ‘불관용’, ‘평등’과 ‘차별’, ‘정의’와 ‘불의’ 사이에 있다.
지난해 5월, 나는 이 칼럼에 ‘선한 미국’이라는 글을 썼다. 그때는 아직 ‘예조’였던 ‘악몽’이 지금은 현실이 됐다. 우리는 이제 긴 악몽의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다만 ‘선한 미국’은 여전히 분투 중이다. 미국 전역으로 확산된 트럼프에 대한 항의운동, 비판의 필봉을 늦추지 않고 있는 매스컴, 대통령이 명한 ‘7개국 출신자 입국금지’에 대한 사법부의 정지명령 등이 그것이다.
‘선한 미국’과 ‘악한 미국’의 투쟁에는 긴 역사가 있고, 그것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어느 나라 국민이든 우리가 어느 쪽에 서야 할 것인지는 자명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어떤가? 이 칼럼을 쓰고 있는 오늘, 세계 ‘주요국’ 수뇌들 중에 가장 먼저 트럼프에게 달려간 일본 아베 총리는 친밀한 ‘개인적 관계’를 쌓기 위해서라며 트럼프와 골프를 즐겼다.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정권의 난민·이민 배척에 대해 질문을 받은 아베씨는 ‘내정 문제’라며 코멘트를 피해 트럼프 지지 자세를 분명히 했다. 당연히 그랬을 것이다. 일본은 세계 주요국들 중 어느 나라보다도 더 난민·이민을 배제하는 나라니까.
아베씨가 강조한 것은 오키나와를 희생시키면서 중국과 북조선을 가상적으로 하는 미-일 동맹 강화다. 전 세계에서 배외주의가 대두하고 있는 이때 자발적으로 그 최선봉에 서겠다는 것이다.
아베씨에 이어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도 미국을 방문했다. 예전에 독일·이탈리아·일본 3국동맹이 있었다. 지금은 미국·일본·이스라엘 3국동맹의 시대인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난이 점점 더 깊어갈 것이다.
그런 가운데 ‘선한 미국’이 분투 중임을 떠올리게 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뉴욕 근대미술관(MOMA)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입국금지 조처를 당한 나라들의 예술가들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환영과 자유라는 궁극의 가치가 이 미술관과 미국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려고 전시했다”고 해설문엔 적혀 있다.
뉴욕 근대미술관은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1939년부터 1981년까지 ‘망명’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피카소는 프랑코파의 내란에 항의해,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 공화국정부관을 위해 이 대작을 제작했다. 내전은 결국 공화국 쪽의 패배로 끝나고 <게르니카>는 유럽 각국을 순회한 끝에 미국에 건너가 뉴욕 근대미술관에 전시됐다. “스페인의 투쟁은 민중과 자유에 대한 반동에 대적하는 싸움이다. 예술가로서의 내 전 생애는 이 반동과 예술의 죽음에 항거하는 끝없는 투쟁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선언한 피카소는 “스페인에 공화국이 돌아올 때까지” 이 작품의 스페인 반환을 거부했다.
프랑코군을 지원하는 나치 공군이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한 1937년, 아시아에서는 중일전쟁이 시작돼 난징 대학살이 자행됐다. <게르니카>(그림) 이후 80년, 인류는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그리고 수많은 전쟁을 경험했다. <게르니카>는 교과서에도 실려 있으나 그것을 그린 피카소의 정신, 그 그림을 울면서 바라본 사람들의 마음에 지금 어느 정도의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을까.
예술에 전쟁을 막는 힘이 있을지, 악한 권력을 무너뜨릴 힘이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 어떤 악몽의 시대에도 관용과 연대, 공감을 추구하는 인간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트럼프와 그 지지자(예컨대 하시모토 도루 전 오사카 시장)라면 <게르니카>를 낙서라고 매도할 것이다. 예술 따위는 ‘엘리트’의 사치품이라고 큰소리칠 것이다. ‘대중’은 더 알기 쉬운 오락을 요구한다면서. 그런 사고방식이야말로 대중 멸시이며, 더없는 반지성이다. 그들의 언동을 보고 나는 투기장에 기독교 교인들(당시의 피차별 마이너리티)을 몰아넣어 맹수들의 먹이가 되게 해 놓고 로마 시민들을 구경하게 한 고대 로마의 지배자들을 생각한다.
예술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게르니카>는 아직 잠들 수 없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