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행복팀 선임기자 ‘민주주의’라는 말을 과학기술계에서 요즘처럼 자주 듣던 때가 근래에 있었을까? 과학기술 정책의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에 담아, 나라 안팎의 과학기술인들이 과학과 민주주의를 말하고 있다. 지구촌 과학의 풍향계가 될 만한 몇몇 학술지를 봐도 분위기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지난 석 달을 한정해 ‘민주주의’ 주제어로 검색하니 <네이처>엔 11건, <사이언스>엔 13건의 글이 나타났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달라지는 미국 과학 정책과 연구환경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과학의 규모가 워낙 크니 그 울림은 지구촌 각지로 퍼진다. 과학기술인들은 트럼프 행정부에서 기후변화 연구가 위축되고 의약품 안전성을 심의하는 까다로운 규제과학의 절차가 완화될까봐 우려한다. 정부 연구기관이 대중과 소통할 때 승인을 받아야 하는 ‘자기검열’ 상황이 올 수 있다고 비판한다. 정부 산하 과학자에 대한 정부 개입이 심해지리라는 걱정도 들린다. 이름난 의과학저널(BMJ)은 ‘트럼프 시대에 과학 지키기’라는 사설을 내어 공공 이해와 사회에 기여하며 자율적으로 나아가는 과학 가치를 지키자고 다짐했다. 과학자들이 정치활동에 뛰어든 걸까? 4월22일 ‘지구의 날’엔 트럼프 행정부의 과학 정책을 비판하는 행진 시위도 추진되고 있다. 이른바 ‘과학을 위한 행진’(marchforscience.com)은 워싱턴 디시뿐 아니라 미국·유럽 도시를 비롯해 지구촌 각지 320여곳에서 열린다. 온라인에서 먼저 퍼진 과학 행진 구상은, 시민과 더불어 과학의 가치를 지키자는 주장과 과학자들이 이익집단으로 비칠 수 있다는 주장이 맞서 논란을 일으켰는데, 지금은 미국과학진흥협회(AAAS) 같은 대표적 단체들이 다수 참여해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과학 행진 누리집에서 그 주장을 보면서 과학의 가치가 왜곡될 우려가 커질 때 과학자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분위기가 무척 부러웠다. 정부가 제시하는 과학 정책 또는 과학적 견해에 의문이 제기될 때 우리 과학기술 단체들은 얼마나 독립적이며 주체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과학 행진은 과학의 가치가 더 넓은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에 닿아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계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누리집의 주장을 보면, 공익에 기여하는 과학, 정직하며 열린 과학 커뮤니케이션, 공공 이해에서 증거 기반 정책과 규제를 옹호하기 등이 과학 행진의 큰 방향으로 제시됐다. 또한 과학이 결국 사람들의 활동이며 공중과 동반관계를 이뤄야 하고 과학을 민주주의의 가치로서 확인하는 것이 행진 목표로 제시됐다. 미국에선 새 행정부 출범이 과학과 민주주의를 부각시킨 계기였다면, 국내에선 탄핵 심판대에 오른 대통령의 과학 정책에 대한 점검과 비판, 그리고 새 대통령의 과학 정책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그 계기가 되고 있다. 요즘은 과학기술 기관과 단체들이 잇따라 여는 ‘다음 정부 과학기술 정책 토론’의 계절이다. 지난 25일엔 여느 토론회와는 성격이 무척 다른 토론 행사에 참여했다. 연단과 청중석이 따로 없이 모든 참석자가 토론에 참여하는 ‘타운미팅’ 방식의 토론회였다. “수평적 소통과 민주적 의사결정”을 유난히 강조한 토론장에선 고교생, 대학생, 연구원, 교수들이 과학의 가치를 다시 소환하는 민주주의의 경험을 나누었다. 과학과 민주주의는 종종 각자의 길을 걷는다고 여겨지며, 둘이 나란히 함께 걸어온 지난 길은 쉽게 잊히곤 한다. 과학의 가치를 되새기는 과학기술인의 행진과 목소리는 건강하며 혁신적인 과학 연구의 발걸음이 민주주의라는 길에서 내디뎌지고 있음을 다시 기억하게 해준다.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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