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1975년 3월17일. 유신체제에 맞서 자유언론을 외치던 동아일보 기자 160여명이 무자비하게 거리로 내동댕이쳐진 지 오늘로 꼭 42년이 된다. 부당한 강제해직이 자행된 지 반백년이 다 되도록, 정권이 수차례 바뀌었음에도 이들은 복직은커녕 명예회복조차 제대로 되지 못했다. 수십년 세월 동안 거리의 기자, 거리의 PD로 그들이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누가 봐도 자명한 일인데, 국가의 불법행위와 손해배상청구권 성립 여부, 청구권의 소멸시효를 두고 지루하게 다투다가 겨우 2016년에야 14명에 대한 1천만원 손해배상을 판결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세월은 무상해서, “못다한 자유언론 투쟁을 계속하기 위한 결의”로 발족했던 동아자유언론수호실천투쟁위원회 113명 가운데 27명이 서거하고 지금은 86명만이 활동 중이다. 어느새 대다수가 칠순을 훌쩍 넘긴 동아투위 위원들은 ‘단 하루라도 편집국 내 자리에 앉아보는 것’이 소원이라 말한다. 그때는 유신독재 군사정권이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자신하던 한국 사회에서 2008년과 2012년 연거푸 자행된 언론인 해직 사태는 진정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공정방송을 위해 낙하산 사장 반대를 외치다가 해직된 와이티엔(YTN) 노종면, 조승호, 현덕수 기자는 어느덧 해직 3000일을 넘기고도 아직 제자리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문화방송(MBC)은 사태가 더욱 심각해서 2012년 이래 무려 160명 이상이 해고나 정직, 대기 또는 부당전보발령 등의 고통을 겪고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잘린’ 박성제와 최승호를 비롯해, 당시 기자회장이었던 박성호와 노조집행부 강지웅, 이용마, 정영하 등은 1, 2심 해고무효 판결에도 불구하고 복직하지 못한 상태다. 독재정권 치하에서 자유언론 수호를 외치다가 해직된 동아일보 기자들을 각성시킨 것은 다름아닌 시민이었다. 신문사 안에 중앙정보부 요원이 상주하며 일일이 제작에 간섭하고 있었지만 기자들은 그저 “대한민국 최고의 신문사 기자라고 우쭐대며” 자유롭고 활달한 편집국 문화에 만족하면서 타협적으로 기사를 쓰며 지냈다. 그러다가 동아일보에 분노한 대학생과 시민들이 몰려와 동아일보 화형식을 하는 것을 편집국 창문에서 목격하고는 “독재 권력에 굴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몰골에 참담한 심정”을 느끼며 기자로서의 소명과 역할을 자각하고 자유언론 수호투쟁에 나서게 되었다고 이들은 회고한다. 40여년 전 동아일보사 옆에는 분노한 시민들이 있었지만 오늘날 문화방송 옆에는 “애국방송 엠비씨를 지키자”는 외침만이 가득하다. 공교롭게도 문화방송 바로 맞은 편에 와이티엔이 있다. 문화방송 노조위원장이었던 정영하는 파업 당시를 회고하면서 민주시민의 질타가 가장 무서웠고 동시에 가장 큰 힘이었다고 술회한다. 박성호는 과거 정치부 기자로서 최고권력자와 그 무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던 자신을 통렬하게 반성하면서 시민의 중요성을 되새긴다. 해직 10년 차에 접어든 와이티엔 노종면은 시민과 집단지성에 대한 믿음과 기대로 버틴다고 했다. 해직된 지 4년만에 암을 얻어 투병 중인 이용마는 수척한 몸을 일으켜 국민의 방송을 국민의 품으로 돌려주자고 광장에서 외친다. ‘촛불 앞에 부끄러운 언론’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자유언론과 공정방송의 외침에 귀기울이는 시민이 있어야 한다. 상암에도 촛불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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