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철
지역에디터
두란, 헌스, 해글러, 레너드.
1980년대 세계 권투 중량급을 주름잡았던 4대 천왕이다. 40대 중반을 넘은 사람 가운데 특히 남성들은 이들이 맞붙은 ‘세기의 대결들’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나는 4대 천왕 가운데 ‘파나마의 돌주먹’ 로베르토 두란과 ‘빡빡이’ 마빈 해글러가 좋았다. 거칠고 무자비하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이던 해글러. 불우한 어린 시설을 딛고 돌주먹을 날리던 두란. 두 사람은 당대 최고의 인파이터로 꼽혔다. 나는 이들의 화끈한 강펀치가 마음에 들었다.
반면 슈거 레이 레너드는 밥맛 떨어지는 선수였다. 양손을 자유롭게 쓰던 레너드는 빠른 발을 이용해 잽과 스트레이트를 던지고 빠지는 아웃복싱을 구사했다. 이런 레너드가 당시 내 눈에는 비겁해 보였다.
나는 2년 전 권투를 시작한 뒤 틈이 나면 권투 동영상을 찾아본다.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이 축구 동영상을 챙겨 보는 것과 같다. 인터넷에는 온갖 권투 동영상들이 있었다. 30년 전 4대 천왕의 경기 동영상들도 있었다.
동영상을 다시 보니 80년대 내 눈엔 얌체였던 레너드가 실제는 최고의 테크니션이었다. 특히 1989년 12월 레너드-두란의 세번째 대결은 80년대 복싱을 결산하는 빅게임이었다. 이 경기에서 레너드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빠른 몸놀림과 왼손 잽으로 유효타를 많이 터뜨리며 경기를 주도해
승리했다.(<한겨레> 1989년 12월9일치)
당시 잽으로 두란을 견제하며 풋워크로 거리를 유지하는 레너드의 경기운영이 놀라웠다. 동영상 속의 레너드는 ‘잽은 모든 공격의 시작이다’라고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링이건 세상이건 안전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지. 그래서 잽이 중요한 거야. 툭툭, 잽을 날려 네가 밀어낸 공간만큼만 안전해지는 거지. 거기가 싸움의 시작이야.”(김언수 소설 ‘잽’)
전에는 하찮은 잽이나 던지는 겁쟁이로 여겼던 레너드가 지금은 경이롭게 보였다. 내가 세파에 시달리고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있는 것 같은데 막상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주먹을 내밀지 않고 있는 고요한 세상이어서 도대체 어디다 잽을 날려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잽’)
나는 앞으로 더 나이가 들어 잽도 못 날리면 ‘홀딩’(끌어안기)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좋든 싫든 무작정 상대를 끌어안는 거야. 끌어안으면 아무리 미워도 못 때리니까. 너도 못 때리고 그놈도 못 때리고 아무도 못 때리지.”(‘잽’)
nura@hani.co.kr
1997년 2월 링 복귀를 선언한 슈거 레이 레너드가 복귀전을 앞두고 훈련을 하고 있다. 애틀랜틱시티/AP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