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에디터 29개국 정상을 비롯해 130여개국 대표단이 지난 14~15일 베이징 외곽 휴양지 옌치후에 모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핵심 전략인 ‘일대일로’(육상·해상 신실크로드)를 세계에 과시하는 이 정상포럼은 올해 중국의 최대 외교 행사였다. 한국에선 우리 특사단과 시진핑 주석의 첫 만남 무대로 주목받았지만, 중국에선 ‘중화제국 부흥’ 무대였다. 시 주석이 개막 연설에서 실크로드 역사를 강조하며 정화의 대항해를 언급한 대목에 눈길이 간다. “기원전 140여년 중국 한대에 장안을 출발한 평화사절이 서방으로 이어지는 길을 개통했다. 장건의 서역 출사다. 당·송·원 시기에 마르코 폴로, 이븐 바투타 등이 실크로드를 여행하고 기록을 남겼다. 15세기 초 명대에 저명한 항해가인 정화가 7차례 원양 항해를 했다. (…) 이들 선구자들은 함포나 칼을 앞세운 정복자가 아니라 우호사절로 기억된다.” 정화의 대항해는 중국의 황금기가 저물고 서양의 시대가 시작되는 상징처럼 여겨졌다. 윈난성 회족 출신 환관인 정화는 영락제의 명을 받아 대규모 호화 선단을 이끌고 아프리카까지 항해했다. 하지만 중국의 해양 진출은 거기서 멈췄고 ‘쇄국의 시대’로 들어섰다. 반면 뒤늦게 보잘것없는 함선을 이끌고 대항해에 나선 서양은 군사력과 제국주의 무역으로 세계를 정복하고 서양의 시대를 열었다는 게 일반적 해석이었다. 이제 역사의 풍향이 바뀌는 것일까. 정화는 일대일로를 통한 ‘중국의 평화적 진출’의 상징으로 되살아났다. 중국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1조달러 이상의 천문학적 자금을 투자해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까지 60여개국에 철도, 다리, 도로 등 인프라를 건설해 중국 중심의 경제권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물론 일대일로가 유라시아 주도권을 차지하려는 ‘중화제국주의’라는 경계론이 나오고, 정치적 논리가 우선인 국가 중심 발전모델이 한계를 드러낼 것이라는 회의론도 많다. 그럼에도 중국은 이미 라오스 정글지대에 다리를 놓고 파키스탄에선 발전소를 짓고, 동유럽을 잇는 철도를 설계해 중국 상품이 유럽 시장으로 이어지는 길을 넓히고 있다. 중국식 ‘세계화 2.0’이다. 반면 ‘미국 우선’(아메리카 퍼스트)을 표방한 미국 트럼프 정부는 기존 무역협정을 흔들고 국외로 나갔던 공장을 미국으로 되돌리는 반세계화, 보호주의 정책을 외친다. 국내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기간 동안 트럼프 캠프와 러시아의 내통 의혹을 수사하던 연방수사국(FBI) 국장을 해임하고, 수사에 개입했다는 메모까지 폭로되면서 탄핵 주장이 확산되는 등 ‘트럼프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기존 제국이 쇠락해 혼란에 빠져들고, 아직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새 제국이 일어서는 아노미 시대다. 이런 시기에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해야 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균형자론을 더욱 절실하게 떠올리지 않을까. 2차 북핵 위기가 고조되고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파병을 요구하던 시기에 취임한 노 대통령은 한-미 동맹 일변도에서 벗어나 강대국 간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창했으나, 한국 보수의 반발과 미국의 견제 등으로 실현하지 못했다. 지금은 한-미 동맹과 한-중 관계 어느 한편으로 기울지 않고, 중심을 잡고 외교·안보 난제들을 풀어가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 역사는 릴레이처럼 진행된다. 한 지도자가 모든 과제를 풀 수는 없지만 후계자가 과제를 물려받아 전진하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가 노무현 정부의 균형자론, 자주국방의 꿈을 계승해 미완의 과제를 이뤄가리라 기대한다. 임기내 전시작전권 환수와 자주국방 강화, 사드 배치 과정의 문제점 조사 등의 공약은 그 출발점이다. 문재인 정부의 균형자론 2.0을 기대한다.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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