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정호승 지음, 열림원, 1998(2016)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이 구절을 ‘연애시’로 한정한다면, “꽃이 져도 즉 세월이 지나도 나는 당신을 여전히 그리워한다”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꽃’, ‘나’, ‘너’는 각자 다른 주체다. 내 감상은 다르다. 꽃=너, 나. 이렇게 둘이다. 꽃이 져도가 아니라 꽃이 졌기 때문에 슬프다. 사랑하는 당신이 꽃처럼 진 것이다.
꽃이 지는 방식도 다양하다. 벚꽃 잎은 흩날리고 동백은 한 송이 전체가 똑 떨어진다. 그래서 벚꽃은 눈발 같고, 동백은 효수(梟首)나 역사의 상징으로 쓰인다. 하긴 요즘 꽃은 아무 때나 피고 봄도 짧다. 더구나 봄의 상징은 꽃이 아니라 황사가 되었다. 메타포의 전제가 사라져 가는 시대다. 다시 말해, 호수가 더러워지면 “내 마음은 호수”가 될 수 없는 이치다. 세상이 더러워지면 시인은 고통받는다.
정호승 시인에게는 실례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꽃이 져도…”의 정확한 출처를 찾는 데 반나절을 썼다. 청하라는 시인의 시구다, 불경에 나온다 등의 주장도 있고 도예가 김용문의 책 <나는 막사발이다>(2010)의 ‘효월’(曉月·새벽달) 부분에도 비슷한 글귀가 나온다. 똑같은 표현은 아니지만, 정호승의 최근 시집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2017)에도 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팽목항으로 가는 길에는 아직 길이 없고…/ 봄이 가도 그대를 잊은 적 없고/ 별이 져도 그대를 잊은 적 없다”(112~113쪽).
이 글의 출전은 훨씬 이전(1998년) 그 유명한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는 ‘수선화에게’가 실린 정호승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이다. 아마 이 시집이 ‘원전’인 듯하다. 제목은 ‘꽃 지는 저녁’.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도 배는 고파라”(전문).
20대 초반, 정호승의 <슬픔이 기쁨에게>와 정희성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가 없었더라면 나는 그 시절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독자를 위로하면서도 각성시킨 당대의 걸작들이다. 이후 시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대통령 문재인’, 아니 ‘인간 노무현’ 때문에 이 시구가 생각났다. ‘그때’ 상주(喪主)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노무현과 박근혜. 모두 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문재인 정부가 박근혜 정권의 실정을 넘어선 실성에 대한 국민의 저항과 성취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노무현. 누가 그를 장미나 백합이라고 하겠는가. 그는 들국화 타입도 아니었다. 민들레나 코스모스처럼 소박했다. 그런 꽃이 졌다. 꽃이 지면서 바람에 날린 씨앗은 광화문까지 왔다.
봄이 왔고 꽃이 피었다. 그 봄은 누구인가. 꽃까지 짓이기며 모든 곳에 앉는 황사의 봄인가(박근혜), 빼앗긴 들에도 온다는 그 봄인가(노무현). 당신이 가니 봄이 왔어요, 당신이 교도소에 가니 봄이 왔어요, 당신이 ‘져서’ 봄이 왔어요. 누가 가서 봄이 왔는가. 둘 다일까? 둘 다인가?
박-최 게이트 때문에 봄이 왔다면 단순한 정권 교체다. 그러나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화된 힘이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길임을 상기한다면, 지금의 봄이 박근혜의 안티테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협치는 절충이 아니고 정당의 일도 아니다. 시민의 힘으로 강제 혹은 ‘거부’하는 것이다. 나는 특정 정당의 집권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분적, 과도적 과정일 뿐이다.
노무현은 ‘적폐들’ 때문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세상에 적응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내 일상도, 심정도 그와 같기에 나는 그가 그립다.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나는 노무현을, 엠비(MB) 시대를 잊고 싶지 않으니 ‘화합’을 강요하지 말라.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 평화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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