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부문장 겸 총괄기획 에디터 나는 예술영화 마니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중영화 취향은 더욱 아니다. 일상의 표층에서 보고 듣고 느끼기 어려운 메시지를 담은 영화에 끌리는 편이다. 내 식으로 말하면 ‘불편한 영화’다. 무슨 노릇인지, 지난 주말 집에서 해피엔딩 가족영화를 내려받았다가 초장에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깨어 보니 제목도 줄거리도 기억에 없다. 대신 소소한 깨우침을 얻었다. 불편하지 않은 영화는 잠을 부르고, 안락은 깨어 있음을 방해한다. 요즘 부쩍 자주 듣는 ‘깨시민’(깨어 있는 시민)으로 연상작용이 번지더니, 시나브로 나홀로 반대말 놀이에 빠져들었다. 깨시민의 반대말은 ‘잠시민’(잠들어 있는 시민)인가? 글쎄다. 반대말은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산토끼의 반대말은 집토끼, 들토끼, 죽은 토끼, 판 토끼, 염기 토끼 따위다. 깨시민의 반대말에는 잠시민 말고도 ‘비시민’이 있다. 잠시민은 내부자지만 비시민은 외부자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민의 반대말은 소년, 여성, 노예였다.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비시민은 차고 넘친다. 그들은 공화국의 시민권, 헌법상 기본권의 외부에서 기거한다. ‘촛불혁명’의 당당한 주역이었던 청소년들은 정작 촛불혁명의 결과물이라는 대선에서 배제됐다. 그나마 몇 살 더 나이 먹으면 시민권을 얻을 것이다. 40여년 전 전태일의 노동3권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기본권이었다면, 지금은 선택받은 일부에게만 남은 특권이다. 장애인들은 최소치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자신의 인격을 저울(장애등급제)에 달아야 한다. 성소수자들은 어떤가. 그들이 부정당하는 건 기본권뿐 아니라 존재 자체다. 소외와 추방의 벼랑끝에서는 눈을 감는 순간 곧 추락이다. 눈 뜨고 있어도 코 베어 가는 세상, 그들은 잠들 수 없다. 모든 비시민은 하릴없는 ‘깨비시민’(깨어 있는 비시민)이다. 비시민에게 깨어 있음이 전공 필수 과목이라면 시민에겐 교양 선택 과목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불편함을 무릅쓰는 일이고, 깨시민은 그 불편을 자처한다. 김두식 교수가 쓴 차별에 관한 책 <불편해도 괜찮아>의 제목만 보면 깨시민에 대한 절묘한 은유 같다. 용인보다는 정치적이지만 연대보다는 비정치적인 위치, 윤리와 정서가 길항하는 자리. 깨시민에게 비시민은 그런 존재가 아닐까. 불편함을 무릅쓰고 타자에게 건너가려는 마음은 귀하다. 하지만 내외하는 관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문재인 정부가 내놓는 잇단 개혁정책들은 지지자들의 기대마저 뛰어넘어 놀라운 효능감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그동안 억눌리고 내몰렸던 이들의 정책적 요구는 계속 불거진다. 문 대통령 지지자들은 불편하게 느낄 수 있다. 저러다 국정이 흔들리거나 적폐세력의 역풍을 부르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국정교과서를 폐지시킨 대통령 업무지시가 전교조의 법외노조 상태를 해소하라는 국제 노동단체들의 요구 앞에서 멈춰섰는데, 이를 불편해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할 수 없다. 기본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맛집 주인이 대기번호표 나눠주듯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국가주의의 성대한 기념일인 현충일에 문 대통령이 청계천 여성노동자와 파독 탄광노동자·간호사를 호명했다. 호명된 이들이 여태 국가가 투명인간으로 취급해온 비시민이었다는 데서 벅찬 감동을 느꼈다. 문 대통령이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아마도 깨시민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뭐든 다 하라고 밀어주고 받쳐주는 걸 넘어서, 강한 요구로 문 대통령의 성공을 이끌 수 있는 주체도 바로 그들이다. 벼랑끝의 깨비시민들이 지금 ‘불편한 영화’ 목록 속에서 잠자고 있지 않는가.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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