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부문장 겸 총괄기획 에디터 일에 치여 사느라 가사에서 손을 뗀 지 얼추 두 계절이다. 자정 넘어 집에 돌아와 넘치는 빨래통을 보고도 세탁기 돌릴 엄두를 내지 못하는 나날이었다. 그렇다고 나와 귀가시간이 어슷비슷한 두 동거인에게 일을 떠넘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집 안 사물들의 계통은 불길 앞의 밀랍인형처럼 녹아내렸고, 장기하의 노랫말대로 눅눅한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지난주, 마침내 큰딸의 전화 통보를 받았다. “가사 도우미 오시라고 했어!” 직권상정이었다. 그녀가 일러준 계좌번호로 서비스 비용을 입금했다. 가사 도우미 얘기가 처음 나온 건 벌써 석 달이 넘었다. 나는 매번 망설였다. 얼굴도 모르는 남에게 얼마 안 되는 돈푼이나 쥐여주며 자차분한 가사의 ‘처리’를 맡긴다 생각하니, 기분이 도통 깔끔해지지 않았다. 동거인들에게도 그런 속마음을 내비쳤는데, 그래도 꽤나 서운했던가 보다. 작은딸은 얼마 전 “우리한테 왜 그리 무심해?”라며 따지기까지 했다. 지인에게 고민과 사정을 털어놨다. 조언을 기대했는데 느닷없는 질문이 돌아왔다. “그럼 장애인이 활동보조 서비스 받는 건 어떻게 생각해?” 고차방정식이었다. 무엇보다 가사 도우미를 부르는 것에 대해 결정을 못 하고 방치해둔 사이, 집에선 탈진한 두 존재가 잔여노동의 압박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었음을 난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큰딸은 제때 끼니도 못 챙기며 하루 14시간 서서 일하는 최저임금 사각지대의 미용실 스태프 노동자다. 작은딸은 세계적으로 가장 중노동 직업인 대한민국 고3이다. 집에서라도 휴식을 보장받지 못하면 그녀들 삶에는 쉼표 하나 찍을 데가 없을 것이다. 장애인이 그렇듯, 누군가의 도움과 보살핌이 절실하다. 가사 노동을 대하는 내 태도에서도 심각한 결함이 발견됐다. 가사 노동이 헐값에 거래되는 문제를 짚기도 했지만, 그 노동이 사적인 공간에서 이뤄지는 점을 들어 ‘거래’ 자체를 불편해하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화폐로 매개될 수 없는 노동은 이미 노동이 아니고, 노동의 공적인 성격이라는 것도 목적이 아니라 우연한 결과일 뿐이다. 애국하려고 자동차 만들고 평등사회 구현하려고 스마트폰 만드는 노동자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난 유독 가사 노동에만 헛된 기준을 들이댄 셈이다. 국가도 다르지 않다. 근로기준법은 가사 노동자를 노동자로 간주하지 않는다. 얼마 전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가사 노동자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유령 같은 존재로 살아온 이들의 노동권을 개선하기 위한 법안을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그즈음, 장애인 활동보조인들도 최저임금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수가를 인상하고 노동권을 보장하라며 행동에 나섰다. 타자를 거들고 돌보는 일이 자동차와 스마트폰 만드는 일보다 노동의 본연에 가깝다는 사실을 이 체제는 언제쯤 받아들일까. 큰딸이 가사 도우미를 부른 날은 일주일에 하루 쉬는 꿀맛 같은 평일이었다. 수시로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평소 관상용으로만 모셔두는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드렸고, 김밥과 떡볶이를 사 와 나눠 먹었다고 했다. 곁에서 지켜보기가 민망해 무시로 복도를 들락거린다고도 했다. 누군가의 머리를 수도 없이 감겨주느라 벌겋게 부르튼 큰딸의 손등이 떠올랐다. 그녀가 가사 도우미의 노동을 알아보고 괜스레 미안해하기까지 하는 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노동과 너무도 닮아서일 것이다. 자정 넘어 집에 돌아와 양말을 벗자 발바닥으로 솔바람 같은 청량감이 전해져왔다. 나라 구하는 일을 한다는 미망 속에 과로에 시달려온 내겐 생경하고도 과분한 감촉이었다.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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