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덕기자 덕질기 2] 멜론빵? 고독한 제빵 작업장 / 최원형

등록 2017-08-02 18:25수정 2017-08-02 21:16

최원형
책지성팀 기자

제빵학원 시절은 천국이었다. 오븐과 발효실 등 필요한 모든 장비와 재료가 거기 있었다. 맨몸으로 가서 시키는 대로 따라하면 그럭저럭 빵이 나왔다. 13주 동안 20여종의 빵을 만들어보는 과정을 모두 마치고 나니, 강사님이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왔다.

“당장 창업에 뛰어드는 건 아니죠? 제빵기능사 자격증을 따는 게 목적이라면 학원 수업을 한 번 더 듣는 게 좋아요. 그냥 취미로 할 거라면 집에서 혼자 이것저것 해봐도 좋고요. 전문적인 제빵공방 같은 곳을 찾아가는 방법도 있어요. 무엇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집에서 혼자 빵을 만들면서 이것저것 사들인 장비들을 대충 모아놓고 보니, 제법 ‘작업장’ 느낌이 난다.
집에서 혼자 빵을 만들면서 이것저것 사들인 장비들을 대충 모아놓고 보니, 제법 ‘작업장’ 느낌이 난다.
그러게요. 과연 전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요? ‘기술을 배우고 싶어요’ 수준의 추상적인 욕망은 이제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구체적이고 명쾌한 목표와 행동 양식이 필요했다. 우물쭈물하다가 지난 13주 동안의 노력마저 물거품처럼 날려버릴 순 없었다. 일단 ‘혼자 힘으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집에서 빵을 만든다’는 소박한 목표를 세웠다. 전기오븐을 비롯한 기본적인 장비와 재료들을 집에 들이고 주말마다 학원에서 만들어봤던 빵들을 꾸역꾸역 복습하다 보니, 제법 나만의 ‘작업장’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중세 장인들의 작업장이 이렇지 않았을까’ 뿌듯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장인은 숙련된 기술과 누적된 경험을 통해 ‘권위’를 인정받고, 그렇게 인정받은 권위를 바탕으로 ‘자율’을 누리는 사람이다. 중세의 작업장과 달리 나만의 작업장에는 일의 표준을 정하고 지시를 내리는 장인의 ‘권위’는 없고, 천둥벌거숭이가 누리는 어설픈 ‘자율’만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과연 이 고독한 작업장에서 혼자 힘으로 장인이 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멜론빵은 학원에서 배우지 않았지만 혼자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나만의 레시피’를 대강이나마 정립한 최초의 빵이다. 단팥빵이나 소보로빵 같은 일본식 단과자빵으로, 멜론향이 나는 비스킷을 빵 위에 얹고 멜론 껍질처럼 격자무늬를 내어주는 것이 특징이다. 설탕가루를 살짝 체에 쳐 뿌리면 더욱 먹음직스럽다.

오븐 속에서 멜론빵이 익어가는 모습. 비스킷 토핑에 격자무늬를 내주는 것이 멜론빵의 특징이다.
오븐 속에서 멜론빵이 익어가는 모습. 비스킷 토핑에 격자무늬를 내주는 것이 멜론빵의 특징이다.
빵 반죽 자체는 어려울 것이 없지만, 비스킷 반죽을 일정하게 분할해 빵 위에 씌울 수 있도록 동그랗고 얇게 펴줘야 하는 작업이 꽤나 번거롭다. 크림치즈에 멜론향을 첨가해 빵소로 만들어 넣으려면 손이 훨씬 많이 간다. 냉장실에서 아무리 차게 굳혀도 여전히 질척하기 때문에 빵 반죽 안에 채워넣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그래도 굳이 그 고생을 해줘야 구워낸 빵을 먹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역시 크림치즈를 넣길 잘했어.”

circle@hani.co.kr

갓 구워져 나온 멜론빵의 모습. 학원에서 배우지 않았지만, 혼자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나만의’ 멜론빵 레시피를 찾았다.
갓 구워져 나온 멜론빵의 모습. 학원에서 배우지 않았지만, 혼자 여러 차례의 시도 끝에 ‘나만의’ 멜론빵 레시피를 찾았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범죄·코믹·판타지 버무렸다…볼리우드식 K드라마의 탄생 1.

범죄·코믹·판타지 버무렸다…볼리우드식 K드라마의 탄생

가상자산 과세,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 2.

가상자산 과세, 득보다 실이 클 수 있다

[사설] 이번엔 가상자산·배당소득 감세 검토, 여야 ‘감세’만 협치하나 3.

[사설] 이번엔 가상자산·배당소득 감세 검토, 여야 ‘감세’만 협치하나

감사원장 탄핵 추진에 “헌법질서 훼손” 반발하는 감사원, 어이없다 [사설] 4.

감사원장 탄핵 추진에 “헌법질서 훼손” 반발하는 감사원, 어이없다 [사설]

우크라이나 전쟁발 가짜뉴스에 돈 내야 할 한국 5.

우크라이나 전쟁발 가짜뉴스에 돈 내야 할 한국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