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이놈아, 너도 늙고 병든다’ / 신승근

등록 2017-09-20 18:34수정 2017-09-20 19:34

신승근
정치에디터

그 눈빛이 뭘 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눈물이 맺힌 듯도 한데…. 그 눈조차 똑바로 맞닥뜨리지 못했다.

“아이들은?”

“아~ 네, 애들, 다 학원 갔어요.”

“너도 먹어라.”

자식은 어미에게 가족과 떨어져 요양병원에 가라는데, 손주의 안부를 묻고 바나나 조각이 담긴 접시를 힘겹게 밀어주면서 50살을 넘긴 아들을 살뜰히 챙긴다. 소설 속 장면 같았다.

어머니의 암 투병 1년여, 고비가 많았다. 한쪽 콩팥을 떼어냈다. 계속 재발하는 뇌종양의 고통에 힘겨워하며 입·퇴원을 거듭했고, 빈 병실을 찾아 전전했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무심해졌다. 온 가족이 나름 힘을 보탰다. 하지만 팔순 노모의 암 투병은 어느새 일상이 됐고, 생계를 핑계로 자식들의 발걸음은 뜸해졌다. 병구완은 늙은 아버지의 몫이 된 지 오래다.

이제 늙은 아버지마저 병들었다. 그나마 곁에서 버텨주던 아버지 입에서 한 달 전쯤부터 “어쩔지, 나도 모르겠다. 힘들다.” “네 엄마, 치매가 오는지 가끔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50살을 훌쩍 넘긴 누나와 머리를 맞댔다. “이게, 사람이 할 짓인지”를 두고 얘기했다. 뾰족한 대책은 없었다. 결국,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셨다. 좀 널찍한 방, 창밖으로 짙은 녹음이 우거진 풍경이 펼쳐진 곳이라는 걸로 서로 미안한 마음을 달랬다. 죄책감은 각자 더 깊숙한 곳에 감췄다.

우리 사회의 고령화 속도가 가파르다. 올해 8월 말로 65살 인구 비율이 14%를 넘어, ‘고령사회’(유엔 기준)에 진입했다. 2025년이면 65살 이상 인구가 20%를 넘어 ‘초고령사회’가 된다. 빈곤과 질병, 무관심과 차별에 직면하는 노인도 늘어간다. 환자 개인과 그 가족에 맡겨두면 ‘사회적 재앙’이 될 것이다.

마침 문재인 정부가 지난 18일 ‘치매 국가책임제’를 발표했다. 입원·외래 등 치료비 부담이 큰 치매 중증 환자들의 병·의원 진료비의 90%를 건강보험에서 부담해, 환자 본인 부담률을 10%로 낮추는 게 핵심이다. “어르신들이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은 국가가 해결할 책무”라는 대통령의 의지가 실린 정책이다.

그런데, 벌써 막대한 예산 부담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문재인 정부 임기 안에 필요한 재원만 약 5조원으로 추산되는데, 고령화에 따른 환자 증가 등으로 향후 천문학적 예산이 들 것이라고 한다. 현재 72만5천명 수준인 치매 환자가 2050년에는 271만명까지 늘어, 치매 관련 비용만 106조5천억원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도 나왔다.

예산을 허투루 낭비하는 건 막아야 한다. 하지만 노인의 존엄을 지키고 질병과 빈곤의 고통을 분담하는 일을 회피해선 안 된다. 나는 건강보험료를 더 내고,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 “1년에 피부과 몇 번 가는 나에게 무슨 건보료를 이리 많이 떼냐”는 볼멘소리를 한 적 있다. 지난 1년여 어머니의 암 투병이 내 생각을 바꿨다. 지난 20여년 동안 내가 낸 건보료가 가족의 고통을 어떻게 완화시켰는지 깨달았다. 환자 부담금을 대폭 낮춘 ‘암 환자 산정특례’가 없었다면 우리 형제는 벌써 배은망덕한 자식이라 손가락질받았을 것이다. 엄청난 치료비 분담 문제로, 큰 분란에 휩싸였을 수도 있다.

건보료 인상, 증세는 민감한 문제다. 저마다 생각이 다를 것이다. 상투적이지만, ‘누구도 세월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부모세대보다 더 긴 시간을 이른바 ‘늙은이’로 보내며, 수많은 고통을 혼자 감내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퀭한 눈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요양병원의 많은 노인, 그들에게도 분명 ‘찬란했던 젊은 날’이 있었다. 어머니를 모실 요양병원을 찾은 나를 지켜보는 그들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놈아, 너도 늙고 병들어, 언젠가는.”

skshi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