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찬
방송에디터석 기자
“작년에 50평 했으니까 올해 100평은 해야지!”
지난 1월의 일이었다. 눈이 수북하게 쌓인, 텅 빈 밭을 둘러보면서 동네 친구이자 회사 동기이자 텃밭 이웃인 정인환 기자는 밑도 끝도 없이 ‘100평 타령’을 했다. “개인 농사 10평씩, 나머지는 공동밭으로 하면 되겠네. 여기는 배추 잘될 것 같지?” 나는 한발 더 나갔다. 이미 머릿속은 하얀 눈밭이 배추와 무로 파릇파릇 채색된 뒤였다. 도시농부 기준으로 5평 소농이 100평 대농으로 거듭나는 순간, 이 모든 것은 배추 때문이었다.
경기도 고양시 선유동 선유아리농장의 밭에서 지난 9일 김장용 배추와 무, 갓이 잘 자라고 있다.
6년 전부터 우리는 “대한민국 최고의 주말농장 입지”라고, 사장님의 자랑이 끊이지 않았던 ‘북한산 주말농장’에서 농사 실무를 갈고닦았다. 상추, 깻잎, 겨자 따위 쌈채소는 5월부터 서리 내릴 때까지 지치도록 먹었다. 아욱, 감자, 호박 등 찬거리도 제철이면 풍성했다. 고추, 가지, 방울토마토 등 열매채소는 사먹지 않아도 될 만큼 거뒀다.
무엇보다 우리가 정성을 쏟은 것은 배추였다. 해마다 주말농장에서 수확한 배추, 무, 갓으로 김장을 했다. 배추의 품질은 농사꾼의 자질이었으며 1년 농사의 성적표였다. 농사 무지렁이 지인들도 배추를 보면 감탄사를 연발했다. 가족들이 먹을 김장을 내 손으로 한다는 것, 뿌듯한 일이었다. 배추는 우리 같은 ‘생계형 도시농부’의 자부심이었다. 농작물 외에도 살짝 힘든 삽질 뒤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와 언제라도 숯불에 노릇노릇 삼겹살을 구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주말농장이 선물한 덤이다.
서울 진관동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북한산 주말농장은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도시농부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2016년 문을 닫았다. 2013년 5월 북한산 주말농장 모습.
지난해 북한산 주말농장이 갑자기 문을 닫았다. 나와 정 기자를 비롯해 회사 선배 2명이 오순도순 농사를 지었던 곳이라 아쉬움이 컸다. 어쩔 수 없이 농장을 옮겨 다섯 가족이 50평을 지었다. 다른 작물은 대체로 잘 자랐다. 배추가 모종을 심자마자 벌레와 곤충의 습격을 받았다. 모종을 세 번이나 다시 냈지만 가을 농사를 망쳤다. 주말농장 시작한 뒤로 김장을 못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내의 타박이 심했다. 도시농부의 ‘배추부심’도 함께 무너졌다.
박종찬 기자의 가족이 2015년 11월 주말농장에서 수확한 배추와 무로 김장을 하고 있다.
지난겨울 또다시 농사가 잘될 만한 땅을 찾아 나섰다. 경기도 고양시 선유동의 아리농장은 햇볕 좋고 바람 잘 통하며 지하수까지 풍부해 농사짓기 더없이 좋은 곳이다. 전체가 대략 1420㎡(430여평)인데, 한겨레 여섯 가족을 비롯해 열두 가족이 자연이 주는 대로 거둬 나누어 먹는다. 다행히 올해 배추는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 9년차 도시농부 체면치레는 할 것 같다.
pjc@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