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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덕기자 덕질기 5] 사람도 키우는 진짜 농사 / 박종찬

등록 2017-11-08 18:02수정 2017-11-08 18:51

박종찬
방송에디터석 기자

사서 고생 밑지는 장사. 냉정하게 따지면 도시농업이 딱 그 꼴이었다. 주말마다 머슴처럼 일하지만 일당은 한 푼 없고, 오히려 밭에 돈을 뿌리고 다녔다. 어림잡아 1년이면 주말농장에 20만원은 넘게 쓰는 것 같다.

들인 비용만큼 수확이 풍족할까? 주말농장에서 채소는 제철에만 흔하고 풍성하다. 수확철에는 너무 많아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일이었다. 제철이 아닐 땐 남들처럼 사 먹어야 한다. 주말농장 대신 해마다 채소를 20만원어치 사 먹는 게 더 싸고 풍족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손으로 키워 밥상을 차리는 순간, 경제적 손익을 따지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었다. 믿을 수 있고 건강한 먹을거리보다 값진 것이 세상에 있을까?

도시농부들이 지난 9월29일 경기도 고양시 선유동 선유아리농장에서 고기를 굽고 모닥불을 피워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도시농부들이 지난 9월29일 경기도 고양시 선유동 선유아리농장에서 고기를 굽고 모닥불을 피워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주말농장에서 키운 수박. 크기는 작지만 예쁘게 잘 크고 있다.
주말농장에서 키운 수박. 크기는 작지만 예쁘게 잘 크고 있다.
어린 시절, 밭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그야말로 지긋지긋했다. 오죽하면 ‘고구마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였다. 고구마를 밥만큼 많이 먹기도 했지만, 심고 거두어 내다 팔 때까지 지겹게 보고 만져서 꼴도 보기 싫었다. 다른 작물도 대체로 비슷했다. 아버지 농사를 거드는 것과 내 농사를 짓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농작물이 자식처럼 사랑스러웠다. 크는 게 궁금해 주말마다 느긋하게 늦잠을 잘 수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애지중지 키운 채소가 못생겼다고 놀리면 은근히 섭섭했다. 마트에서 채소 코너를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농민들의 수고에 비해 농산물값이 턱없이 싼 것 같아 늘 안타까웠다.

주말농장의 요리. 고구마순무침.
주말농장의 요리. 고구마순무침.
주말농장의 요리. 절임 배추.
주말농장의 요리. 절임 배추.

수확한 채소를 다듬고 씻는 일은 물론 요리도 내 손으로 하는 일이 잦아졌다. 봄이면 비름, 미나리, 냉이 따위 푸성귀를 삶아 나물을 하고, 여름에는 고구마 순을 다듬어 된장에 조물조물 무쳐 먹었다. 가을엔 노각무침이 별미였다. 김장할 때는 배추를 절이고 씻는 일, 양념거리를 다듬는 것이 내 몫이었다. 동치미를 담그고, 무시래기를 엮어 베란다에 말렸다. 농사의 완성은 요리였고, 도시농부의 진가는 주방에서 더 빛났다.

주말농장의 요리. 김장김치.
주말농장의 요리. 김장김치.

농사는 마음의 휴식을 줬다. 밭을 갈고, 풀을 매는 일, 새싹을 솎아주는 일은 단순하면서 반복적인 몸의 노동이었다. 땀 흘리면서 몸의 기운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수선한 마음이 맑아졌다. 농장 벗들과 나눈 ‘텃밥’은 늘 즐거웠다. 함께 일을 하다가 힘들면 숯불에 고기를 굽고, 모닥불 옆에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좋은 사람들과 일과 먹을거리, 생각을 나누는 즐거움은 농사가 준 가장 큰 선물이자 가르침이었다.

도시농부를 하면서 작물만 키운 게 아니었다. 더불어 사람도 크고 있었다. 닭장을 지어 유기농 계란을 받고 쌀을 자급자족하는 그날까지, 생계형 도시농부들의 도전은 계속된다. <끝>

pj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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