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도시재생본부장 세운상가 7층엔 55년 동안 오디오를 고쳐온 이승근씨가 있다. 그 바로 위층엔 47년 동안 진공관만 만져온 류재용씨가 있다. 50년 된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엔 30년 된 세입자들이 산다. 이들은 대부분 세운상가가 전자산업 성지였을 때 이곳에서 터를 잡기 시작한 기술자들이다. 그들이 가진 기술이 희귀한 것이 되고, 상가가 쇠락해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까지 늘 비슷한 임대료 덕분이었다. 2015년부터 세운상가를 다시 ‘핫플레이스’로 만들자며 도시재생사업을 추진하면서 가장 큰 고민은 세운상가가 다시 일어서면 수십년간 이곳을 지켜온 상인들이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상인들의 내몰림, 젠트리피케이션을 방지하기 위해 서울시는 건물주와 임차인 간 ‘상생협약’을 추진했다. 건물주는 임대료 인상을 자제하고, 임차인은 세운상가 활성화를 돕겠다는 약속이었다. 쉽진 않았다. 부동산에 얽힌 복잡한 이해관계를 털어내고 합의에 이르려면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까? 시는 2년8개월 동안 주민협의체 회의(36회), 설명회(17회), 인터뷰(270회) 등을 통해 지역주민, 상인들과 만났다. 지난해 9월 재생사업을 거친 세운상가가 ‘다시 세운’이라는 이름으로 열렸고 지금까지는 오래된 상인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도시재생사업으로 지역이 변해도 중요한 것은 젠트리피케이션의 속도와 양이 지역주민과 임차상인이 인정할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막대한 공공재정과 행정지원을 들인 도시재생의 성과가 건물주 등 특정인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에게 골고루 배분돼야 한다. 세운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첫째는 상생협약이다. 우선 지역주민들의 적극적 참여가 중요하다. 임대료가 오르면 결국 그 피해는 지역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간다. 상생협약은 그 지역 고유의 개성과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겠다는 약속으로 지역사회 공동체의 자기규약이자,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반이다. 둘째, 임차인 보호제도가 더욱 강화돼야 한다. 정부는 임차기간은 최대 5년, 임대료 상한율은 연 9%로 정했던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시행령’을 고쳐 임대료 상한선을 5%로 낮출 예정이다. 임대기간도 손댈 필요가 있다. 일본은 기간약정이 없는 대신 해지사유가 엄격하고, 프랑스는 임차기간이 10년으로 우리나라보다 임차인 보호를 우선시하고 있다. 모든 지역에 적용이 어렵다면 적어도 도시재생지역에 대해서는 지방자치단체가 임대료와 임차기간을 특별히 정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부동산 임대시장 안정화를 견인할 공공임대상가를 늘릴 필요가 있다. 공공임대주택처럼 공공이 상가를 매입하여 저렴하게 임대하는 상가를 서울 곳곳에 확보·활용한다면 상가 임대시장이 불안정할 때 제어수단이 될 수 있다. 다만, 막대한 공공예산 투입이 필요하다. 정부에서 도시재생에 50조원을 투자하고, 그중 기금으로 매년 5조원씩 총 25조원을 지원할 계획으로 임차인에게 최소 이자율(통상 1.5~2.5%)로 기금을 지원한다면, 임차인은 낮은 이자율을 바탕으로 수익을 낼 수 있고, 이 수익을 다시 기금으로 회수·운영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새해부터 중앙정부가 ‘도시재생 뉴딜’ 사업을 본격 추진한다. 주거복지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얻는 대가로 기존 상인들은 밀려나고 껍데기만 남게 되는 백화현상을 겪는 도시재생의 역설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