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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만열 칼럼] 용서·화해가 평화·통일의 토대

등록 2018-01-11 18:12수정 2018-01-12 14:51

이만열

다윗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1차 분열을 극복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력과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빼앗으려는 ‘원수’를 용서함으로 이루었다. 핵문제로 평화를 보장할 수 없는 한반도와, 갈등과 증오로 진통을 되풀이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다윗의 행적은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새해를 맞으면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이 갈수록 더해진다. 올해 초에는 우리의 분단현실과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 분열의 역사를 비교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고대 이스라엘은 두 번 분열되었다. 첫 분열은 다윗에 의해 통일되었으나, 그 뒤 기원전 930년경 분열된 유다와 이스라엘은 갈등으로 민족 역량을 소진시키다가 멸망하고 말았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그 뒤 민족적 정체성마저 상실했고, 남유다는 바빌로니아의 침략을 여러 차례 받다가 기원전 586년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성서의 역사를 꺼내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이스라엘이 겪었던 남북 분열의 역사는 같은 분단의 역사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분열사를 우리의 문제와 관련시켜 논의해보려는 그런 시도를 여태껏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이나 분단 이후 외세와의 관계를 보더라도 우리와 사정이 별반 다른 것 같지 않다. 그런 점을 전제한다면, 이스라엘 분열의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준다. 거리에서 태극기와 이스라엘기를 함께 흔드는 ‘애국 크리스천’들도 고대 이스라엘 역사가 주는 의미를 되새기는 기회를 갖는 것이 어떨까.

다윗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1차 분열을 극복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력과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빼앗으려는 ‘원수’를 용서함으로 이루었다. 초기 유다-이스라엘의 통일이 다윗의 용서와 인내의 산물이었다면, 오늘날 핵문제로 한순간도 평화를 보장할 수 없는 한반도와, 갈등과 증오로 진통을 되풀이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다윗의 행적은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눈여겨볼 것은 그의 용서와 화해가, 산전수전 다 겪고 난 뒤에 행한 것이 아니고 통합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 혈기방장한 때에 수행되었다는 것이다. 약간 지루하겠지만, 먼저 다윗이 수행한 화해의 여정을 시간대로 복기해보자.

골리앗과의 일대일 대결에서 물매돌 한 방으로 승리, 하루아침에 영웅으로 떠받들리게 된 다윗에게는 그 명성에 값하는 험난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시골 베들레헴에서 8형제 중 막내였고, 양치기로 자란 수금(하프) 연주자에 용기·무용·구변을 갖춘 준수한 청년이었다. 골리앗에게 승리한 후 그는 사울 왕의 호위대장으로 왕의 식탁에 같이 앉기도 했고 왕의 부마로 점쳐지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왕의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그 후 다윗의 삶은, 왕자 요나단과의 생명을 담보한 언약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피해 산악과 광야를 헤매며 동굴을 처소로 삼는 신세가 되었다. 고난 속에서 남긴 수많은 시는 그가 얼마나 풍부한 문학적 감수성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불안한 환경에서도 그는 보복하기보다는 용서하고 정의롭지 못한 자들을 내침으로 지도자로서의 경륜을 쌓아갔다.

사울이 3천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추격했을 때다. 그가 혼자 다윗이 머무는 동굴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다윗의 측근들은 이때야말로 복수할 기회라고 충동했지만 그는 사울의 옷자락만 베었다. 뒤에 다윗의 관용을 알게 된 사울은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사울이 다시 3천 군대를 끌고 다윗을 추포하려 나선 어느 날 밤, 다윗과 수행원은 사울 일행이 잠든 틈을 타 그들의 야영지를 기습하여 복수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사울의 머리맡에 둔 창과 물병만 갖고 나오고 왕의 생명에는 손대지 않았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에게 보복 대신 자비로 그를 일깨웠다.

아둘람 굴에서 400명으로 출발한 다윗 공동체는 공평과 정의를 세우는 데에 힘썼다. 다윗의 용사들이 진영을 비운 사이 외부의 습격을 받아 남녀노소 가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 소식을 듣자 다윗은 습격자들을 추격하여 막대한 전리품까지 챙기게 되었다. 전리품을 나누는 과정에서 그는 공정 분배를 시행해 공동체의 정의를 세워갔다. 당시 진중에는 공격에 참여하지 않은 장병에게는 전리품을 분배해주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했지만, 다윗은 이들을 설복하여 공동체 전원에게 동일하게 분배했다. 이 원칙은 뒷날 이스라엘 사회의 분배 정의의 규례로 삼게 되었다. 말하자면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이렇게 경제 정의의 기초로 확립해 통일왕조 경제윤리의 기반으로 다져갔다.

다윗이 피신해 있는 동안, 사울과 아들 요나단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사울 왕조는 끝나가고 있었다. 다윗은 서두르지 않고 기울어가는 사울 왕조에 최대의 예우를 갖추었다. 한 청년이 사울의 왕관을 갖고 와 자신이 사울을 죽이고 그의 소지품을 가져왔다고 거짓 보고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저녁때까지 사울에 대한 애도를 표한 후 그 청년을 사형에 처했다. 그 스스로 왕을 ‘참수’했노라고 증언했으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사울을 존경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피흘림으로 사회정의를 세울 수 있다고는 보지 않았다.

사울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이스보셋이 이스라엘의 왕위를 이었으나, 그를 보필하던 군사령관 아브넬이 차차 이스라엘의 강자로 등장했다. 이 무렵 다윗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유다 한 지파를 다스리는 왕이 되어 헤브론에 자리잡았다. 분열시대, 사울 왕가와 다윗 왕가 사이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아브넬은 장로들과 논의해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옹립하기로 합의하고 헤브론에 와서 다윗과 협상한 뒤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다윗의 군사령관 요압 형제가 귀국길에 오른 아브넬을 살해했다.

이스라엘을 무혈로 통합하려는 계획은 위기에 처했고, 다윗이 아브넬을 살해했다는 의혹까지 뒤집어쓰게 되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다윗은 변명하지 않고 죽은 아브넬을 위해 장례를 엄숙히 치르고 애가(哀歌)를 지어 애도하며 종일 금식으로 진심 어린 슬픔을 다했다. 이런 진정성이 유다와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감동시켜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이 아닌 줄을 알게 되었다”. 백성들의 오해가 풀리자 다윗의 통일 노력은 다시 탄력을 받게 되었다.

대결과 갈등을 넘어 화해와 정의에 바탕한 다윗의 통일 정책은 계속되었다. 다시 두 사람이 이스라엘 왕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 목을 다윗에게 가져와 ‘왕의 원수를 갚았다’고 우쭐했다. 그러나 다윗은 전에 사울의 전사 소식을 전해준 청년에게 했던 것처럼, “내가 어찌 너희의 살인죄를 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면서 두 사람을 즉결처분했다. 다윗의 용서·화해는 이렇게 정의에 기초해 있었다. 사울 가문의 종말로 다윗은 유다-이스라엘의 통일을 완성, 화해와 공의가 승리자임을 보여주었다. 성서에는 다윗의 공과가 거의 숨김없이 기록돼 있지만, 통일 과정의 다윗에게는 용서와 화해가 돋보인다.

다윗은 30살에 헤브론에서 유다 지파의 왕위에 올라 7년6개월을 다스렸고, 예루살렘으로 옮겨 33년 동안 전 이스라엘을 통치하며 70살까지 그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약하게 보이는 ‘용서와 화해’가 가장 강력한 것 같은 ‘폭력과 보복’에 승리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는 자신의 이해관계보다는 공동체의 공의를 앞세움으로 정의의 질서를 세워갔고, 공정 분배에 기초하여 나라의 경제 질서를 세웠다.

그가 20대에 사울을 피해 광야에서 쌓은 깊은 영성은 시편의 저 유려한 시들을 남겼고, 동굴에 거하며 지었다는 시편 57편 8절 “내가 새벽을 깨우리라”는 구절은 많은 선각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곳곳에서 새벽을 깨우는 역군들을 출현시켰다. 다윗이 통일 이후의 집권기에는 대외정복을 외면하지 않았지만, 민족 내부의 통일 과정에서는 ‘용서와 화해’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스라엘 통일왕조의 초석이 그랬던 것처럼 ‘평화·통일’의 토대도 여기에 있다.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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