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지성팀 선임기자 작가 조세희를 만났다. 오랜만이었다. 얼마 전 신문사의 후배 기자가 낸 책이 계기가 되었다. 책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표사’라 불리는, 책 뒤표지 추천글을 그가 쓴 것. 감사 인사를 드릴 겸 만나는 자리에 몇 사람이 함께했다. 책을 쓴 기자와 이 글의 필자를 포함해, 2008년에 나온 책 <침묵과 사랑>의 공저자들이었다. 조세희의 대표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 출간 30주년을 기념하는 그 문집이 나온 것도 벌써 10년 전이니, 올해는 <난쏘공> 출간 40주년이 되는 해다. 이미 십수년 전에 200쇄를 훌쩍 넘기고 지금도 꾸준히 읽히는 현대의 고전이 <난쏘공>이다. 그 책 이후 조세희는 소설집 <시간여행>(1983)과 사진 산문집 <침묵의 뿌리>(1985)를 냈지만, 그 뒤로는 30년이 넘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다. 더 문제적인 것은 그가 90년대 벽두에 <하얀 저고리>라는 장편을 잡지에 연재하고도 책으로 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파일 상태로 그 작품을 읽어보았고, 어느 해엔가는 그 소설이 곧 책으로 나온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특종이라 생각했지만 오보였다. <침묵과 사랑>에 보탠 내 글의 제목은 ‘<하얀 저고리>를 기다리며’였다. 이번 만남의 계기가 된 후배 기자 책의 표사 한 대목이 내게는 그 글에 대한 대답처럼 다가왔다. “나는 쓰는 일을 안 한 것이 아니라 쓰지 않는 일을 한 것이다.” 궤변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이 담대하고 슬픈 ‘선언’을 둘러싼 앞뒤의 문장들을 살펴보면 작가의 뜻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언어가 시대를 바꿔 뜻을 배반할 때 언어의 변신과 대결하며 침묵하는 것. 쓰지 않는 것은 스스로에게 건 싸움이었다. (…) 글이 무력한 시대에 처음부터 쓰이지 않는 것이 글의 복일 수도 있다.” 언어의 배반과 글의 무능력이라는 현실 앞에서 작가의 선택지가 역설적으로 침묵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에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침묵하는 작가의 고통과 슬픔을 헤아릴 필요는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조세희의 ‘침묵의 뿌리’는 무엇일까. 출판사를 옮겨 새로 낸 2000년 신판 <난쏘공> ‘작가의 말’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난쏘공>의 주인공 일가만이 아니라 소설 바깥의 한국인들 모두가 자라지 못한 난쟁이라는 인식이다. 그날 만남에서 조세희는 “난장이한테 미안해 죽겠다”고 말했다. 그가 미안해하는 것은 소설 <난쏘공>이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난쟁이들이기도 한 것 같았다. <하얀 저고리> 출간 의사를 묻는 질문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시대와 사회에 관해 발언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세시간 남짓한 만남 동안 조세희의 말은 2005년 11월 여의도 농민대회 당시로 자주 돌아갔다. 두 농민이 경찰 폭력으로 숨진 집회였다. 그는 “내가 날아다녔던 시절”이라고 그 무렵을 회고했다. 카메라를 들고 시위 선도차량에 올라 사진을 찍던 때였다. 쇠약해진 그는 당시의 건강한 신체와 열정을 그리워하는 듯도 싶었다. 모임이 끝날 무렵 그는 “석달 동안 할 얘기를 세시간 만에 다 했다”고 말했다. 막스 피카르트의 책 <침묵의 세계>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말은 침묵으로부터, 그리고 침묵의 충만함으로부터 나온다.” 조세희의 완고한 작가적 침묵 아래에는 얼마나 많은 말들이 웅크리고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언제 어떻게 터져 나올 것인가.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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