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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기고] 일상에서 만나는 차별법령 / 김외숙

등록 2018-01-25 18:30수정 2018-01-25 19:04

김외숙
법제처장

부산에서 변호사로 일할 때 한 남자분이 찾아오셨다.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얼굴에 심한 흉터가 있었다. 택시 운전을 하다가 강도를 만나서 얼굴을 크게 다쳤는데, 흉터 때문에 사회생활은 거의 불가능하고 보상금도 너무 적어서 억울하다는 사연이었다. 관련 법령을 찾아보니 얼굴에 같은 흉터가 있어도 남자는 여자보다 낮은 장해등급으로 판정되었고 여자가 받는 보상금의 4분의 1 정도만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불합리한 차별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외모의 흉터에 대해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등급의 보상을 받도록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이 개정되었다. 2003년 일이다.

그런데 법제처장 부임 후 작년 9월에 비슷한 내용의 법안이 법제처에 접수되었다. 화재로 후유장애가 생긴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보험금액을 조정하는 화재보험법(화재로 인한 재해보상과 보험가입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이었는데, 외모의 흉터에 대해 남녀를 차별하던 규정을 이제야 비로소 동일하게 시정하는 내용이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이 개정된 지 14년인데 아직 이런 차별적인 규정이 법령 속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법령을 총괄하는 법제처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국가는 법령을 만들어만 놓고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바꾸어야 한다. 법령 정비는 법제처의 오래된 기능이다. 법제처는 작년부터 불합리한 차별법령을 발굴해 정비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독학사 차별이다. 독학사 제도를 통해 학위를 취득해도 법령에서 정규대학과 차별하고 있다면, 실제 취업 현장에서 취업 기회조차도 얻을 수 없다. 법제처는 90건의 법령 조문을 찾아내 정비했다. 또한 법령에서 지나치게 엄격하게 결격사유를 두어 한 번 실패한 사람은 재기를 어렵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법제처는 기회의 평등이 보장되도록 60건의 결격사유를 합리적으로 정비하는 개정안을 마련해 국회에 제출했다.

새해부터는 법령 전반에 걸쳐 불합리한 차별을 규정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 2년간 집중 정비하려 한다. 예를 들면, 우리 고용보험법은 직장어린이집 설치를 장려하기 위해 교재비나 보육교사의 인건비 등을 일부 지원하도록 하고 있는데, 그 지원 요건 중 하나로 해당 직장에 다니는 근로자의 자녀 수가 그 직장어린이집 전체 인원의 일정 비율 이상일 것을 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직장에 실제 근무하는 전체 근로자가 아니라 해당 직장 소속 근로자로만 한정하다 보니, 파견근로자의 자녀는 정부 지원을 받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입소를 거절당하기도 한다. 같은 직장에 근무하면서도 차별받는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이렇게 국민 실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차별적 법령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실제 법령을 적용받고 그 효과를 체감하고 있는 국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법제처는 작년부터 국민참여 입법센터 홈페이지와 국가법령정보센터 애플리케이션에 ‘차별법령 신고센터’를 개설해 차별법령에 대한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있고, 올해에는 직접 사회단체의 목소리도 들으려 한다.

“법은 빈자(貧者)에게도 부자(富者)에게도 똑같이 다리 밑에서 잠자는 것을 금하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는 다리 밑에서 노숙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부자에게 노숙 금지를 규정하면서 법 앞의 평등이라고 말하는 19세기의 형식적 법치주의를 비판한 아나톨 프랑스의 말이다. 불합리한 차별법령의 정비를 통해 실질적 법치주의가 더욱 실현되는 무술년 새해를 만들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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