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7월16일 당시 집권당이던 공화당은 돌연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대법원이 갖고 있던 위헌법률 심판권의 위헌 정족수를 대법원 판사(현 대법관) ‘3분의 2 이상 출석, 과반 찬성’에서 ‘3분의 2 이상 출석,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바꿔버렸다.
3년 전 정부여당은 군인이 전사하거나 부상해 연금 등을 받으면 국가를 상대로 별도의 손해배상 소송을 할 수 없게 국가배상법을 개정했다. 매년 1천명 이상의 전사자에다 베트남 파병으로 사상자가 늘자 국고 부담을 우려해 소송 권한 자체를 봉쇄해버렸다. 그런데 위헌 가능성이 커지자 법으로 원천봉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대법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1년 6월22일 전원합의체에서 개정 법원조직법과 국가배상법의 문제 조항 모두를 ‘위헌’으로 결정해버렸다.
한달 뒤 검찰이 돌연 향응을 제공받았다며 판사 2명의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판사들이 이에 반발해 집단 사표를 내면서 그 유명한 ‘1차 사법파동’으로 번졌다. 당시 검찰의 영장을 박정희 정권이 사주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박 정권은 이듬해 10월 유신과 함께 법원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헌법에서 대법원의 위헌법률 심판권을 폐지해 헌법위원회로 넘기고, 대법원 판사 16명 중 위헌 의견을 낸 9명 전원을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국가배상법에 있던 문제의 ‘이중배상 금지’ 조항은 아예 헌법에 못박아 지금까지 족쇄로 남아 있다.(이상 한홍구의 <사법부> 참조) 이로 인해 군인이 순직해도 36개월치 봉급이 보상의 전부였다. 2004년 군인연금법과 시행령 개정으로 보상액이 다소 오르긴 했으나 이 헌법 조항 때문에 ‘보상’의 한계는 벗기 어려웠다.
청와대가 20일 유신 이래 지금까지 46년간 헌법에 남아 있는 군인·경찰 등에 대한 이중배상 금지 조항을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늦었지만 환영한다.
김이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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