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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경식 칼럼] 21세기 동아시아에서 미켈란젤로를 생각한다

등록 2018-04-05 18:17수정 2018-04-05 18:58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 89년 생애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의 작품이다. 많은 피에타상들은 어머니 마리아가 죽은 아들 예수를 품에 안고 있다. 하지만 이 론다니니의 피에타상에서 어머니는 등 뒤에서 아들을 껴안고 서 있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지옥’에서 무수한 어머니들이 아이의 주검을 등 뒤에서 껴안고 서 있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지난 3월 하순, 4박의 바쁜 일정으로 서울을 찾았다. 이번 방문의 주목적은 최근 출간한 <나의 이탈리아 인문기행>의 북토크 모임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그 북토크는 이탈리아 문화원 공동주최로 3월10일에 열렸다.한국이 내 나라지만 일본에 일터와 주소가 있는 나는 그다지 자주 한국에 오진 못한다.

따라서 한국 사회나 사람들에 대한 나의 인상은 불가피하게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그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번 여행에서 사람들 표정이나 입에 올리는 말의 편린들에서 ‘봄’의 예감 같은 것을 느꼈고 내 마음도 꽤나 누그러졌다.

이건 꼭 계절로서의 ‘봄’ 얘기만은 아니다. 지난해 가을부터 올해 초에 걸쳐 고조되고 있던 군사적 긴장 분위기가 평창겨울올림픽을 거치면서 완화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급속히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개최가 결정됐고 3월26일에는 북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전격적으로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했다. 불과 몇주 전까지도 예측할 수 없었던 급속도의 진전이다.

물론 이런 움직임의 앞날을 낙관할 수만은 없다. 특히 미국의 트럼프 정권은 초강경 매파인 존 볼턴을 새 국가안보보좌관 자리에 앉히고 더욱 강경한 자세로 외교협상에 임하려 하고 있다. 자칫 잘못되면 방아쇠를 잡아당기는 형국이 될지도 모를, 살얼음판을 딛는 듯한 나날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다. 문재인 정권의 쉽지 않은 조타수 역할도 계속될 것이다.

그래도 국민 다수가 잠시나마 엄혹했던 긴장에서 풀려난 건 다행이다. 이 평화 무드를 꼭 유지해 가기를 간절히 바란다.

최근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텔레비전은 탤런트 구사나기 쓰요시와 <엔에이치케이> 해설위원 야나기사와 히데오가 서울 용산의 한 아파트를 빌려 살면서 이웃 주민들과 교류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내보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다수 살았던 그 지역에는 6·25전쟁 이후에는 실향민이 많이 살았고, 지금은 탈북자들이 살고 있다.

야나기사와는 고령의 주민과 막걸리잔을 나누면서 걸프전쟁(1990~91년)을 현지에서 취재한 기억을 떠올리며 “절대로 전쟁은 안 돼요, 안 돼” 하며 눈물을 흘렸다. 너무 소박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정직한 모습이었다. 귀중한 소박함이었다. 매사에 의심이 깊은 나로서도 호감을 가질 만한 장면이었다.

“절대로 전쟁만은 안 된다”는 그 심정을 많은 사람들이 굳건히 간직하기를 바랐으나, 현실은 어떠할지.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는 게임 감각으로 방관하고 있지나 않은지. 게다가 눈앞의 이익 때문에 전쟁 위기를 부채질하는 정치권력을 추종하지는 않는지.

그것은 상처 입고 쓰러진 타자에 대한 무관심일 뿐만 아니라, 곧 자신에게도 닥쳐올 위험에 대한 무관심,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냉소주의다.

예멘에서는 ‘세계 최악’의 인도주의적 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약 800만명이 기아상태에 놓여 있다. 공습, 질병, 영양결핍 등으로 아이와 노인, 여성들이 계속 죽어간다. “살려 주세요!”라며 울부짖는 사람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게 나와는 무관한 것일까?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지 7년이 지났으나 사태 수습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동안 수십만 시민들의 삶이 파괴되고 목숨을 잃었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공습이 계속되는 다마스쿠스 근교의 동구타 지구 모습을 “지상의 지옥”이라고 했다. 이게 과장일까?

앞서 얘기한 <이탈리아 인문기행>은 2014년부터 4년간에 걸쳐 쓴 글이다. 그 4년간 세계는 더 나빠졌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는 다음 전쟁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 이 지상에 지옥은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가 잠시 평화를 향유하고 있는 동아시아도 내일은 지옥으로 변할지 모른다. 나는 요즘 다가오는 위기를 강하게 의식하면서 무거운 마음으로 글을 써왔다.

지난 2000년 졸저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도쿄의 이탈리아문화회관이 주는 ‘마르코 폴로 상’이라는 것을 받았다. 민족적 소수자요 파시즘 시대에는 차별과 박해를 받았던 유대계 지식인 프리모 레비가 전후 이탈리아에서 ‘문화적 영웅’으로 평가받은 것은 분명 이탈리아 사회의 자랑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계몽주의·인문주의의 고향인 이탈리아가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선한 전통을 지켜온 증좌이기도 하다.

이건 추측이지만, 일본의 소수자인 내게 그런 상을 준 것은 소수자에 대한 격려와 연대, 보편적 이성에 대한 확고한 지지, 그리고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불관용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본이나 미국은 물론 이탈리아 사회조차 지금 불관용 기운이 고조되고 있다. 3월의 총선거에서는 이민 배척을 내세운 극우정당과 포퓰리즘 정당이 대량 득표를 해, 비리 등의 문제로 실각한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정당도 복권에 성공했다. 인문주의는 그 고향인 이탈리아에서도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번 책은 30대 젊은 시절부터 이탈리아에 매료당한 내가 60대 후반 나이에 다시 한번 이제까지의 여행 족적을 더듬어가며 앞서간 이들의 고뇌와 투쟁을 배우면서 이런저런 ‘인문학’적 성찰을 시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성찰 중에는 ‘절망적’이라고나 해야 할 이 세계에서 과연 인문학적 정신(휴머니즘)은 멸종해버렸는가, 인문학적 정신을 오늘의 시대적 요청에 맞게 재건할 수 있을까, 정말 ‘인간’에게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라는 진부할지도 모를 무거운 질문들이 담겨 있다.

여행은 로마에서부터 페라라, 볼로냐, 토리노를 거쳐 밀라노에서 끝났다. 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재회했고, 밀라노에선 그 미켈란젤로의 말기 작품 <론다니니의 피에타>와도 재회했다. 피에타에서 시작해서 피에타로 끝난 여행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라면 우리는 흔히 저 늠름하고 훤칠한 피렌체의 다비드상을 떠올리면서 그 이미지를 작자 자신과 겹쳐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젊은 날의 미켈란젤로는 “스스로 오락을 금하고 벗을 사귀지 않으며 젊은 여인에게 눈도 주지 않는 음울하고 과묵한, 걸핏하면 싸우려 든”, “인간 혐오”자였고 성격은 뒤틀려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일생 중에 피렌체의 정치체제는 격변을 거듭했고 치열한 전란이 되풀이됐다. 미켈란젤로의 생애는 그 60년에 걸친 이탈리아 전쟁 시기와 완전히 겹친다. 저 만능의 거인도 ‘인간적 약점과 소심한 보신’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에겐 전란을 멈추게 할 힘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대리석 덩어리를 하나하나 깎아서 수수께끼 같은 미완의 피에타상을 남겼다.

<론다니니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 89년 생애의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의 작품이다. 바티칸의 피에타 등 많은 피에타상들은 어머니 마리아가 죽은 아들 예수를 품에 안고 있다. 하지만 이 론다니니의 피에타상에서 어머니는 등 뒤에서 아들을 껴안고 서 있다. 주검을 무덤에서 끌어내고 있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 존재하는 ‘지옥’에서 무수한 어머니들이 아이의 주검을 등 뒤에서 껴안고 서 있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이토록 우매하고 무력하다. 세계를 더 낫게 만드는 데 소용이 없다면 예술에 무슨 존재가치가 있을까? 그럼에도 만일 예술마저 없었다면 인간은 무슨 존재가치가 있을까… 무력한 나는 그렇게 혼자 묻고 있다.

번역 한승동(독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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