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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황석영발 평화열차, 심장아 나대지 마라 / 김은형

등록 2018-05-02 18:45수정 2018-05-02 22:27

김은형
문화스포츠 에디터

“각국의 저명한 문인들, 가령 터키의 오르한 파무크와 미국 작가 폴 오스터 등이 다섯량 정도의 객차에 타고 프랑스 파리에서 출발해 서울까지 오는 겁니다. 오는 동안 베를린에서는 음악제를 하고, 옴스크에서는 학술제를 하고, 평양에서는 평화선언을 채택하고, 비무장지대에서는 페스티벌을 여는 거지요. 10년 전에는 무산됐지만, 최근에 다시 문화체육관광부와 통일부에 제안을 해놓은 상태예요. 내년 8·15쯤에 열차를 운행하고 싶습니다.”

지난 3월12일 한국을 찾은 프랑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르 클레지오와 한국 소설가 황석영의 대담(<한겨레> 3월13일치)에서 평창겨울올림픽을 계기로 화해의 급물살을 탄 남북 정세에 대해 논하면서 황씨는 자신이 제안했던 “평화열차” 구상안을 소개하며 이런 말을 했다. 이 열차에 함께 타게 될 보도진에 들어간다면 억수로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또 한편의 내심으로는 “역시 황구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화해 국면에 들어섰다고 해도 어느 세월에 남북의 철도가 연결되고 이처럼 드라마틱한 유라시아 횡단 일정이 현실화될 수 있겠나 싶었던 탓이다.

황씨는 2008년 이 평화열차 제안을 했다가 “공상과학소설 같은 구상”이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고, 당시는 이명박 정권 때라 많은 이들이 그의 구상 자체보다 정치적 속내만 열심히 넘겨짚고 계산해댔다. 나 역시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비단 보수화되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울역에서 평양을 통과해 베이징을 가고 모스크바를 거쳐 베를린까지 이어지는 철도라니,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 방향으로 달리면서 ‘아시안 하이웨이’라고 적혀 있는 표지판을 볼 때마다 ‘허무개그’처럼 느껴지곤 했는데 마치 그 표지판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앞의 문이 열리는 경험도 없고, 문을 여는 상상력도 빈곤한 평범한 이에게 그 문은 그저 벽으로만 보였던 셈이다.

두 거장이 이야기를 나눈 지 두달 만에, 그리고 황씨가 ‘공상과학적’ 상상력을 펼친 지 10년 만에 그 육중한 문이 움직이고 있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 선언’을 통해 남북의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벌써부터 재계에서는 건설, 물류 등 관련 수혜주가 거론된다. 바쁜 건 기업들뿐만이 아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은 남북한 작가들과의 미술 교류를 부활하기 위해 지난달 이미 일본에서 총련 관계자들과 협의를 시작했다.

지난 겨울올림픽에서 시뮬레이션으로만 볼 수 있었던 북한 고려 문화재의 실물 전시도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될 태세다. 또 북한 소설이 다시 한국 사회에 공식적으로 등장하고 북한 작가들의 남한 방문이 추진되는 등 황석영 작가의 “평화열차” 프로젝트처럼 현재 문화체육관광부에 신청된 남북 문화교류 제안서만 해도 100건이 넘는다고 한다.

덩달아 마음이 부산해진다. 기업인도 아니고 예술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 마음까지 설렌다. 남북 철도가 연결되면 티브이나 휴대폰으로 보고 감격하는 남북 교류가 아닌 나 스스로가 그 교류의 한복판으로 뛰어들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바짝 조여지는 기분이다. 다들 벌써부터 마음은 평양 옥류관에 가 있고, 모스크바와 파리를 향해 달리는 기차 안에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설렘에 대해 호들갑이라고 냉소한다. 2000년과 2007년 정상회담의 결과를 보라며 정신 차리라고 한다. 물론 앞으로도 북-미 정상회담을 비롯해 넘어야 할 산들은 많다. 그렇다고 지금의 설렘을 애써 진정할 필요가 있을까. 현실의 변화는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내년 8·15쯤” 평화열차에서 다시 펼쳐질 황석영과 르 클레지오의 대담을 기대해본다.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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