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반민특위 습격사건’ 이후 비판 발언에 나선 강욱중은 국회 소장파 의원들의 입을 막으려는 소위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최후진술에서 그는 “… 남북통일, 외군철퇴 등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독자적인 견해로 한 것이고 결코 선동이나 사촉은 아닌 것이다. 굳건히 살아서 가지를 뻗어 민국의 큰 재목이 되는 것이나, 죽어 썩어져 민국의 비료가 되나 같은 민국을 위한 길일 것이다”라고 했다.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70년 전 그 선거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은 개인적인 이유도 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나는 그날 학교에 가지 않고 동네 친구들과 놀다 마당 한켠에 있는 옹기에 머리를 크게 다쳤다. 면 소재지의 병원을 찾았으나 선거 때문인지 병원은 닫혀 있었다. 민간요법으로 수습하긴 했으나 오랫동안 흉터가 있었고, 머리를 기르고 난 다음에야 그 흉터를 덮을 수 있었다. ‘5·10 선거’는 이렇게 내 머리 상처와 함께 잔영으로 남아 있다. ‘5·10 선거’를 생각하면 이런 추억 못지않게 선거 앞뒤에 있었던 고향 마을의 갈등과 아픔이 되살아난다. 38선에서는 먼 남녘이었지만, 이념적 38선은 어느 곳 못지않았다. 서북청년단이 와서 면소를 향해 총을 쐈다는 소문, 그들이 무장한 채 우리 동네 앞을 지나며 위협하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일까, 자고 나면 어느 동네의 구장이 죽창에 찔려 죽었다는 둥, 어느 곳에서는 엊저녁에도 산에서 사람들이 내려왔다는 둥 소문이 흉흉했다. 면민들은 그렇게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장례식을 치렀고, 초등학교에 다니던 우리도 동원되곤 했다. 해방 당시 고향에는 인텔리들이 꽤 있었다. 이념 때문에 두문불출한 지식인이 있었는가 하면, 일본에서 공부한 지주의 아들 강아무개씨는 이상에 따라 소작문서를 불사르고 소작인들에게 토지를 나눠주었다는 믿기 어려운 ‘신화’를 남겼다. 우리 집안의 아저씨뻘 되는 분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로서 몇년간 옥살이도 했으나, 해방 후 북쪽으로 가서 토지개혁에 참여했다고 북의 어느 인사로부터 들은 바가 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조씨 집안의 어느 젊은이는 해방 후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켜 재벌기업의 기초를 닦기도 했다. 얼마 전 고향을 방문하니, 그 재벌 1세를 기리는 송덕비 건립을 추진 중이라는데 반대 여론도 만만찮았다. 그러나 정작 소작문서를 불살랐다는 ‘신화’를 남긴 분은 아직 ‘소문’ 속에만 존재할 뿐, 그의 뜻에 상응하는 어떤 배려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 70년 전에 견문한 내 고장의 갈등과 아픔이 해방 당시 우리 역사의 축소판임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다. 해방 후 중앙에서 송진우·장덕수·여운형·김구 등 지도자들이 테러로 희생되는 동안, 제주와 대구, 여순 등지에도 내 고장에서 벌어졌던 갈등의 확대판이 판박이처럼 뒤따랐다. 그중에는 단독선거라 할 ‘5·10 선거’를 빌미로 갈등이 확대된 곳도 있었고, 6·25를 전후한 시기에는 전투행위와 무관한 살육도 벌어졌다. ‘보도연맹’으로 희생된 수십만의 장정들에게서 보이듯이, 자신의 책임과 상관없이 희생된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게 ‘5·10 선거’ 전후에 일어났다고 하니 ‘5·10 선거’를 또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철들고 난 뒤에 깨달았지만, 오늘 우리가 이만큼의 삶을 누리는 것도 이름 없이 죽어간 이들의 희생이 화평의 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1948년의 ‘5·10 선거’는 보통·평등·비밀·직접 선거의 원칙에 따라 국회의원을 선출한 대한민국 최초의 시험대였다. 과도입법의원에서 제정한 선거법에 따라 선거권은 만 21살 이상, 피선거권은 만 25살 이상의 모든 국민에게 부여했으나, 일제하의 경찰, 헌병, 관료, 중추원 참의 등 ‘친일파’들에게는 피선거권이 제한되었다. ‘5·10 선거’는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김구, 김규식, 홍명희 등과 일부 정당, 단체들의 불참에도 불구하고 전체 유권자의 79.7%(약 780만)가 등록했고, 등록 유권자의 95.5%가 투표에 참여한 가운데 948명의 입후보자가 경쟁했다. 유권자 등록에 당국의 강제가 있었는가 하면, 이승만의 무투표 당선을 위해 동대문 갑구에서는 최능진의 입후보를 막는 불상사도 있었다. 인구 15만을 한 선거구로 하여 200명을 선출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제주도의 2개 선거구 외에 198명만 선출되었다. 의원 분포는 무소속(85), 대한독립촉성국민회(55), 한국민주당(29), 대동청년단(12), 조선민족청년단(6), 한두명을 낸 군소정당들 순이었는데, 한국민주당원 중에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된 자가 많았다. ‘5·10 선거’와 관련해 최근 우리 고장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첫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고향 인사들은 다섯 분. 그중 한 분은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한 전력이 있고, 한 분은 토호적 성격을 가졌으며, 두 분은 문중을 의식하고 나선 것 같다는 세평이다. 40살에 당선된 강욱중(姜旭中)은 중학 3년 중퇴에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어 조선민족청년단과 관련하여 정계에 입문했다. 그의 득표율은 24.19%(1만807표), 5명 중 20% 이상 득표자가 4명이나 되었고 차점자와는 505표 차이였다. 함안 조씨의 텃밭인 이 고장에서 항렬로 숙질간인 두 조씨가 단일후보를 이루었다면 강욱중의 당선은 어려웠을 터. 두 조씨의 득표를 합치면 34%에 2만표가 넘었다. 강욱중 의원이 국회에서 어떤 의정활동을 했는지, 그 후의 생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선거구민에게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2년 임기의 제헌국회에서 1년 남짓 의정활동을 했고 11개월여는 옥중에서 지냈으며, 6·25가 터지자 그 며칠 후 출옥했으나 남에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안군민 중 강 의원이 어떤 의정활동을 했으며, 북에서 어떻게 생을 마감하게 되었는지에 관심 가진 이를 본 적이 없다. ‘5·10 선거’ 당시 선거벽보를 통해서만 내게 인지되었던 그가 내 관심의 대상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역사를 공부했다는 것이 내 고장 첫 국회의원에 대한 관심을 외면할 수 없었다. 북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도 정처를 잃고 떠돌아다니는 고혼(孤魂)에 대한 연민을 일으켰다. 남북정상회담으로 들떠 있는 이때, 숨죽이며 살아온 그 유족들의 한은 어땠을까 하는 부채의식도 더 강렬해진다. 김약수(金若水), 노일환(盧鎰煥), 이문원(李文源) 등과 함께 제헌국회에서 소장파 의원으로 활동하던 강욱중은 변호사 경력 때문인지 의사진행에 밝았고 원내 발언 또한 진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이후 비판 발언에 나선 그는 국회 소장파 의원들의 입을 막으려는 소위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고, 1949년 6월20일 구금되어 이해 11월18일부터 공판에 회부되어 이듬해 3월14일 제19회 언도공판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최후진술에서 그는 “… 남북통일, 외군철퇴 등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독자적인 견해로 한 것이고 결코 선동이나 사촉은 아닌 것이다. 굳건히 살아서 가지를 뻗어 민국의 큰 재목이 되는 것이나, 죽어 썩어져 민국의 비료가 되나 같은 민국을 위한 길일 것이다”(<자유신문> 1950년 2월15일치)라고 했다. 이 발언에서 죽음까지 각오한 그의 심경을 읽을 수 있다. 최후진술은 또 자신들을 남로당과 연관시켜 간첩사건으로 몰고 간 오제도 검사의 논고가, 남북통일과 외군철퇴 문제를 주장한 자신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였음을 시사했다고도 보인다. ‘국회프락치 사건’에 연루된 소장파 의원들은 6·25 발발 후 출옥, 7월31일 김약수 등 13명이 기자회견을 했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재목’이 되거나 ‘비료’가 되기를 원했던 ‘민국’에서 수감되고 공산치하에서 석방되었을 때 그들의 선택은 좁혀졌다. 거기에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은 자의와는 무관하게 그들을 북행길로 몰아갔다. 1956년 7월5일자 <노동신문>에, 그가 평양에서 조소앙 등과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는 기사가 보이지만, 그의 이름이 보이는 것은 여기까지다. 제헌의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 청산과 자주통일을 부르짖으며 개혁세력으로 등장했던 그와 소장파 의원들은 분단의 고통을 겪으며 역사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연재이만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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