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에디터 예상대로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은 아름다운 말들로 장식됐다. 평화, 안정, 번영, 신뢰…. 당장이라도 세계를 핵전쟁의 불구덩이로 밀어넣을 것 같던 두 지도자는 하이드에서 지킬 박사로 돌아온 듯하다. 그들의 자아가 하이드로 되돌아가지 않게 해야 한다. 찬란한 언어는 그 자체로 좋지만 스스로 낙엽 한 장도 옮기지 못한다. 북-미는 후속 협상과 조처를 할 것이다. 대략 종전선언, 불가침조약, 평화협정이 이어질 수 있다. 이것들도 아무런 물리적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동안 북-미와 남북 관계에서 나온 성명, 선언, 합의들이 증거다. 북한이 가장 원하는 것은 안전 보장이라고 한다. 북-미 정상 공동성명에도 미국의 “안전 보장” 약속이 들어갔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에도 너무 중요한 약속이다. 이 대목에서 과거의 불가침조약들은 얼마나 지켜졌는지 따져보자. 불가침조약은 1939년 독일과 소련이 맺은 게 가장 유명하다. 속절없이 깨졌고, 그 파장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당시는 불가침조약의 전성시대였다. 독일은 소련뿐 아니라 영국·폴란드·덴마크·에스토니아·라트비아와, 소련도 폴란드·핀란드·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일본과 각각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문서들은 일진광풍에 모조리 휴지가 됐다. 불가침조약 목록은 사실은 깨고 싶은 약속들의 명세서였다. 불가침조약은 대개 역설과 반어를 수반해왔다. 거창한 약속을 한 발짝이라도 현실화의 영역으로 밀어넣어야 할 책임이 한반도의 당사자들과 관련국들에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근 미국 매체 <액시오스>에 나온 기사가 눈길을 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평양에 맥도널드 점포를 내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개인 취향의 반영일 수도 있다. 그가 맥도널드 치즈버거를 한자리에서 4개를 먹었다는 주장도 있다. 김정은 위원장과 햄버거를 먹으며 얘기하고 싶다는 말을 언젠가 평양에서 실천할 수도 있다. 아쉽게도 12일 북-미 정상의 업무오찬 식단에 햄버거는 오르지 않았다. 사실 정크푸드의 대명사 맥도널드는 국제관계 분야에서 나름의 명성을 갖고 있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1996년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는 나라끼리는 전쟁을 안 한다는 이른바 ‘맥피스(McPeace) 이론’을 내놓았다. 중산층이 두텁고 서로 경제적 관계가 깊으면 싸울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비슷한 취지의 ‘무역 기대 이론’의 대중판인 셈이다. 이게 맞느냐 아니냐가 국제정치학 쪽의 논쟁거리 중 하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침공했을 때 ‘왜 맥도널드를 먹는 나라들끼리 싸우냐’는 시비가 일었다. 중국과 미국이 으르렁거리는 것은 뭐냐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지정학적 패권 다툼과 극심한 무역 불균형이라는 특수성이 있다. ‘맥피스 이론’은 법칙일 수는 없고 상식의 표현이다. 서로 무역과 투자로 엮일수록 무력 분쟁에 휘말리면 잃을 게 많다. 교류가 많으면 상대의 사회와 문화를 더 이해하고 존중하게 된다. 상대국에 자국 출신이 많이 산다면, 민주주의 국가일수록 무력 사용에 신중해질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화염과 분노”를 말할 때 미국 언론들은 ‘슬프게도’ 한국 수도권의 2천만 인구는 간단히 건너뛰고 한국 거주 미국인 25만명을 걱정했다. 하여튼 한반도를 구원한 것은 맥도널드였을 수 있다. 무역이든 인적 교류든 냉정히 보자면 서로 ‘인질’이 돼주는 것이다. 전근대 국가들이 평화를 담보하려고 왕자를 상대국에 보낸 것도 같은 이치다. 맥도널드든 버거킹이든 평양에 가면 좋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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