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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종석 칼럼] ‘CVID’를 누른 북-미 정상의 코드, ‘신뢰구축’

등록 2018-06-17 20:43수정 2018-06-18 10:38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김정은 위원장은 시브이아이디(CVID) 대신에 ‘신뢰구축’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코드를 북핵 문제 해결의 열쇠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그가 목표한 ‘핵무기가 없어도 생존할 수 있는 북한’의 가능성을 그의 ‘인민’들에게 보여주었다.

6월12일 북-미 정상회담은 70년간 철옹성처럼 버텨온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의 진정한 서막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실로 한반도 안보지형을 근본적으로 뒤바꾸겠다는 대담한 합의였다.

그러나 필자의 욕심이 과해서 초점을 놓친 탓일까? 북-미 공동성명의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에는 당혹스러웠다. 기대했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CVID)와 그에 상응하는 북한에 대한 완벽한 체제안전보장(CVIG)의 구체적인 교환과는 거리가 먼 원론적인 합의를 담은 공동성명이 나온 것이다. 이 추상적인 공동성명을 가지고 미국은 어떻게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또 북한은 어떻게 그들이 원하는 경제제재 해제를 얻어낼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무언가 놓친 것은 아닐까?” 분석 끝에 곧 이번 공동성명이 시브이아이디(CVID)-시브이아이지(CVIG) 교환 모델과는 다른 프레임에서 만들어졌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정상회담의 합의가 공동성명 속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성명 밖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북한 미사일 엔진 시험장의 폐기와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지와 같은 중요 조치들을 북한과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합의방식은 북한이 제안하고 미국이 수용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 핵심에는 ‘신뢰구축’이 있다. 공동성명에도 “상호 신뢰구축이 한반도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다는 공동의 인식” 아래 4개항에 합의한다고 되어 있다. 저명한 언론인인 김영희 대기자는 한 토론회에서 “시브이아이디가 합의문에 들어갔다 해도 상호신뢰가 없다면 그 이행을 보장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지적을 했다. 본질을 꿰뚫는 문제의식이다. 사실 거꾸로 시브이아이지에 대해서도 김정은 위원장 입장에서 북-미 간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는 믿지 못할 것이다.

북한은 자신이 물리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비핵화에 비해 구두약속이나 서면보장으로 받아야 하는 체제안전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는 방식으로 상호 간에 신뢰가 증진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비핵화와 체제안전보장의 교환을 제안했을 것이다. 북한은 자신의 프레임을 관철하기 위해 우선 조건 없이 핵·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중단과 풍계리 핵시험장 폐기를 단행하고 억류 미국인들을 석방했다. 실제로 이러한 ‘선의의 조치’가 북-미 간 초보적인 신뢰를 만들어내고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발판이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이제 북-미 정상회담이 만들어낸 정세 발전과 북-미 간 신뢰구축이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지 조치와 상승효과를 발휘하며 북한 지도부에 비핵화의 명분을 제공하여 추가적인 비핵화 조치들을 가능케 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북한의 ‘선의의 조치’에 상응하여 또 다른 전향적 조치를 취할 것이다. 결국 신뢰와 ‘선의의 조치’들이 선순환을 이루는 프로세스로서 새로운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왜 김정은 위원장을 신뢰하고 새로운 프레임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최대의 압박과 제재로 인해 김정은이 어쩔 수 없이 비핵화로 나오고 있다고 판단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기만을 우려했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이 비핵화를 통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북한을 만들고 싶어 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실제로 김정은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걸어온, ‘미국의 위협’에 대처해서 군사력을 강화하느라 경제가 어려운 ‘빈곤한 북한’을 거부한다. 그는 ‘경제적으로 융성한 북한’을 열망하며, 이를 위해 핵무기를 포기하고 대신에 미국의 체제안전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용의를 표명했다. 군사주의가 아닌 경제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국가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아마 트럼프 대통령은 짧은 단독 정상회담에서 이를 직접 확인했을 것이다.

결국 김정은 위원장은 시브이아이디 대신에 ‘신뢰구축’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코드를 북핵 문제 해결의 열쇠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바로 이 과정에서 그가 목표한 ‘핵무기가 없어도 생존할 수 있는 북한’의 가능성을 그의 ‘인민’들에게 보여주었다. 북한식으로 말한다면 미국의 위협에 대처해서 만들어낸 ‘핵 보유 전략국가’에서 강대국과 대등하게 한반도 정세를 주도적으로 변화시켜 나가는 ‘핵 없는 전략국가’로의 전환을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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