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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재봉의 문학으로] 번역비평, 번역과 비평

등록 2018-07-12 22:22수정 2018-07-13 13:28

최재봉
책지성팀 선임기자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이고 ‘베스트셀러’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의 지은이이기도 한 황현산은 연구나 평론, 칼럼 집필 같은 일보다는 번역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표나게 드러내곤 했다. 힘겨운 투병 와중에 그가 오래 준비해온 <말도로르의 노래> 번역본을 내놓은 것은 번역에 대한 그런 신념이 시킨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한겨레> 지면과 누리집에서는 칸트 전집 번역을 둘러싸고 연구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특정 어휘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지에서부터 가독성과 원문에의 충실성을 둘러싼 원론적 대립까지, 논쟁은 번역을 둘러싼 다양한 논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얼마 전 처음으로 그리스어 원전 번역이 나온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기존 중역본이 지닌 심각한 문제를 새삼 알게 해주었다. 번역은 매우 복잡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번역의 중요도에 비해 번역에 관한 논의는 그리 활발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조재룡 고려대 불문과 교수의 존재는 종요롭다. 그가 새로 낸 번역비평집 <번역과 책의 처소들>은 <번역의 유령들>과 <번역하는 문장들>에 이어 번역을 집중적으로 다룬 세번째 단독 저작이다. 이 책에 실린 글 가운데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은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은 한강 소설 <채식주의자>의 데버러 스미스 번역본에 대한 비판이다.

‘번역은 무엇으로 승리하는가’라는 제목을 지닌 이 글에서 조 교수는 스미스 번역본의 문제를 다각도로 짚는다. 생략된 주어를 엉뚱하게 해석한다거나, 걸려온 전화를 받은 사람을 거꾸로 전화를 건 사람으로 바꾸고, ‘사상체질’을 ‘특정 사상’(a certain ideology)으로 오해하는 식으로, 한국어 독해력 부족에서 비롯된 오역의 사례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조 교수가 그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따로 있다. 번역자가 주인공들의 성격을 원작과 거의 정반대로 해석하고 그 해석에 맞게 원문을 첨삭함으로써 소설 전체의 주제가 바뀌었다는 것.

이런 지적에 대해 스미스는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변화와 해석일 뿐이라며 ‘창조적이지 않은 번역은 없다’는 말로 자신의 작업을 변호한 바 있다. 이런 반응을 예상한 듯 조 교수는 <채식주의자> 불역본과 스미스의 영역본을 비교하며 이렇게 말한다. “영어 번역이 창작적 재능을 십분 살려 원문에 번역가의 주관과 감정을 덧씌운 반면, 프랑스어 번역은 원문을 정확히 반영하려는 노력 자체가 벌써 창의적인 재능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번역에서 창의성이란 원문에 대한 충실성과 다른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가능한 한 정확하게 옮기는 데에 창의적 능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조 교수가 보기에 문학 작품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학성’이다. “텍스트를 ‘문학이게 해 주는 것’을 번역하기, 다시 말해 작품의 가치를 결정짓는 문장의 특수한 구성이나, 작가라면 반드시 염두에 두었을 문체, 고유한 리듬이나 어휘의 독특한 사용 등 우리가 흔히 ‘문학성’이라 부르는 요소들이야말로 번역가가 제 모국어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할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번역은 비평의 성격을 띠며, 더 나아가 창작의 요소까지 지닌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외국 문학 연구자가 해야 하는 일 중 번역만큼 필요한 것, 절실한 것, 도움을 주는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라고, 그는 앞선 책 <번역하는 문장들>의 서문에 쓴 바 있다. 번역 작업에 관한 황현산의 신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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