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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노동의 산수 / 김회승

등록 2018-07-18 19:39수정 2018-07-19 09:30

김회승
경제에디터

“가계소득을 적정 수준으로 올려 성장의 발판으로 삼는 소득주도 성장, 중소기업을 성장동력으로 키우는 혁신성장을 뼈대로 경제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1년 전 이맘때, 갓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내놓은 ‘새 정부 경제정책방향’이다. 새 정부 경제정책의 변화와 성과를 1년 만에 채근하는 건 다소 이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패러다임 전환’ 운운하기엔 작금의 상황이 너무 민망하고 초라하다. 핵심적인 경제정책들은 준비 부족으로 출발부터 삐걱거리고 있고, 보수 언론과 재계는 물론 경제부총리마저 패러다임 전환을 타박하고 있으니 말이다.

냉정히 보면,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 정책에 대한 비판이 틀린 건 아니다. 고용 부진을 예로 들어보자. 소득 결정 요인은 고용(시간)과 임금인데, 소득이 줄고 (최저)임금이 올랐다면 고용이 감소한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똑같은 임금에 일하는 시간이 줄어든다면 소득이 감소하는 것도 당연한다. 거창하게 경제학 원리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계산 가능한 산수에 가깝다. 그러면 이 정부의 경제정책 입안자들은 과연 이런 기초적인 산수를 몰랐다는 것일까?

재계와 보수 언론의 주장에는 태생적으로 기득권과 지대 추구 세력의 이해관계가 숨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늘 ‘자본의 산수’를 설파한다. 고용·소득 부진을 혈세로 메우는 건 반시장적이라거나, 민간의 임금 구조에 정부가 개입해선 안 된다거나, 복지 지출은 경직적이어서 재정에 영속적 부담이 된다는 등이 그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경제정책의 중심을 이동하는 문제다. 오랜 기득권과 지대 추구 세력의 이해관계를 뒤집는 힘든 일이다. 돌이켜보면 1987년 이후 벌어진 노동자 대투쟁은 우리 사회의 경제사회적 기반을 크게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정치적 민주화에 이어 실질적인 노동조합의 태동은 우리 사회 중산층을 두텁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노동자의 가처분소득이 늘어나고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의 지급능력이 커지면서 전체 수요를 촉진시키는 선순환이 나타나던 시기다.

냉정히 생각해보자. 지금처럼 연간 5조~6조원 수준의 정부지출 확대로 ‘사람이 중심인 복지국가’를 만든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수출에서 내수로, 현격히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라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모자란 쪽을 우선 채워야 한다. 자본의 산수에 한참 기울어진 운동장에 ‘노동의 산수’를 도입하는 거대한 방향 전환 없이는, 패러다임 전환이나 새로운 경제의 선순환은 기대하기 힘들다.

얼마 전 한 대기업 임원이 이렇게 물어왔다. 요즘 청와대의 대기업 정책 기류가 바뀐다는데, 그럼 고용을 늘릴 투자처가 어디냐는 것이다.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최적화된 생산 시스템을 추구하는 대기업들이 국내 고용 이슈 때문에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공장을 다시 늘릴 순 없지 않으냐는 항변과 함께. 그래서일까. 최근 정부가 벤처 창업 투자에 재벌 돈을 끌어들이는 정책 프로그램을 준비중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증시에선 벌써부터 제2의 벤처붐이 한바탕 불 것이라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노동계가 인정하든 말든,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요구사항을 들어줬으니 이젠 재벌 투자를 가로막는 각종 규제를 좀 풀어주자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모양이다. 올해 하반기에는 노동 유연화를 위한 행보도 본격화할 태세다. 때마침 진보성향 지식인들이 현 정부에 “담대한 사회경제 개혁”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모두 동의할 순 없으나, 이들이 직감하는 참여정부의 데자뷔는 내게도 낯설지 않다. 아직 늦지 않았다.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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