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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만열 칼럼] 잊힌 독립운동가들을 생각한다

등록 2018-08-16 17:56수정 2018-08-17 09:10

김원봉·김두봉은 혁명열사릉이나 애국열사릉 어디에도 없다. 어찌 그들뿐이겠는가. 해방 73년에 남북 정부가 들어선 지 70년, 올해에만 세 번 남북정상회담을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남북 정부가 이런 문제를 법과 제도에 얽매여 실무적 차원의 포상기준 개선으로 풀지 못한다면, 일종의 민족적 합의와 결단을 통해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3년 전 영화 <암살>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한때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라는 말도 잠시 들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원봉은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는 사람들 밖에서는 알려진 존재가 아니었다. 일제가 그에 대한 현상금을 백범보다 더 높였다곤 하지만, 그의 명성은 연좌제로 고생했던 친인척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필자도 몇 년 전 경남 밀양의 그의 생가와 부인 박차정의 무덤을 찾아보고는 만감이 교차했다. 일제 군경을 공포에 떨게 했던 김원봉이었지만 해방 후 광복된 나라에서는 잊히도록 강요된 이름이었고, 그가 환국하면서 옮겨온 부인의 유해는 무덤이랄 수 없는 곳에 방치되었다. 분단은 땅과 체제를 갈라놓았고, 지도자에 대한 호의도 자유롭지 못하게 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지역은 단연코 경북이지만, 밀양도 그 못지않다.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일찍이 신흥무관학교에서 잠시 수학한 후 의열단을 조직해 일제에 대한 ‘암살·파괴’ 활동을 시작했다. 의열단의 이념과 행동강령은 1923년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선언은 당시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주장하던 외교론·자치론·준비론을 통렬히 비판하고, 암살·파괴·폭동이 운동의 주된 방략이며, 조선총독부·동척·매일신보사 등 다섯가지 파괴할 곳(五破壞·오파괴)과 조선총독·일본군수뇌·매국노·친일파 거두 등 ‘죽일 놈 일곱’(七可殺·칠가살)을 적시했다.

의열단은 1920년 부산·밀양경찰서 폭탄투척(박재혁·최수봉)을 시작으로 조선총독부 폭탄투척(1921, 김익상), 상하이 황포탄의 다나카 기이치 대장 저격 미수(1922, 김익상·오성륜·이종암), 종로경찰서 폭탄투척과 도심 총격전(1923, 김상옥), 도쿄궁성 폭탄공격 미수(1924, 김지섭), 동척·식산은행 폭탄투척(1926, 나석주), 경북 의열단 사건(1925), 두 차례의 베이징 밀정 암살사건(1925, 1928) 등을 감행해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김원봉은 1926년 ‘암살·파괴’ 운동의 한계와 조직적인 항일군대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여러 동지들과 함께 스스로 황포군관학교 생도로 입교한다. 그곳에서 장제스, 저우언라이 등과 친분을 쌓았고, 뒷날 항일운동에 도움을 준 중국인 동기생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약산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워 항일운동의 핵심인력을 양성했는데 그중에는 민족시인 이육사도 있었다. 이렇게 양성한 인력은 1938년 우한(무한)에서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핵심이 되었고, 그 일부는 자신과 함께 충칭(중경)으로 가서 광복군에 합류했으며, 일부는 타이항산(태항산)으로 가서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돼 팔로군과 협력하게 되었다. 1941년 임정 참여를 선언한 약산은 그 이듬해 그가 이끄는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키고, 자신은 광복군 부사령,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해 좌우합작 임시정부를 이룩했고, 해방과 더불어 서울로 들어왔다.

귀국한 김원봉은 혼란한 정세에서도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노력한다. 의열단 동지 유석현의 증언에 의하면, 그 무렵 그가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여 그 뒤 행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노덕술은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약산을 잡아 ‘빨갱이 두목’이라고 뺨을 때리며 모욕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 거두가 친일 경관에게 수모를 당하고 풀려난 후 사흘을 꼬박 울며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하며 한탄했다는 것이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된 후 그는 친일파와 극우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였고 거처까지 옮겨 다녀야만 했다.

김원봉이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하고 평양에 남게 된 것은 이런 배경이 있다. 북한에서 그는 한때 인민공화당 위원장으로서 활동했지만, 1948년 9월 북한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으로 입각했고, 그 뒤 노동상,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직 등을 역임했다. 그런 중에도 6·25 때 납북되었던 조소앙·안재홍 등과 인연을 맺고, 이들과 ‘중립화 평화통일 방안’ 등을 모색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58년 11월 ‘연안파’가 숙청될 때 김원봉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관내에서 누구보다 혁혁한 항일운동을 벌인 약산은 이렇게 사라졌고, 남북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다.

잊힌 독립운동가는 그만이 아니다. 독립운동 현장에서 평양으로 들어갔다가 유일체제 확립 과정에서 항일운동의 행적마저 빼앗긴 이들이 적지 않다. 모두 민족사에서 기억해야 할 분들이다. 주시경의 제자로 한글 학자였던 김두봉도 그런 분이다. 망명 후 그는 상하이와 충칭을 거쳐 옌안(연안)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을 이끌었다. 조선독립동맹은 임시정부와 더불어 일제 말기 가장 강력한 항일독립운동단체의 하나였다. 그는 북한으로 들어와 한동안 제2인자로 활동하며 북한의 한글혁명에 큰 공을 세웠다. 그 역시 연안파 숙청 때 시골로 쫓겨나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 한국의 독립이, 여운형의 말과 같이, 선열들이 일제와 투쟁하여 자유를 쟁취한 결과라고 한다면,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은 이념과 체제를 떠나 민족운동사의 보고에 모셔야 할 존재들이다.

김원봉·김두봉은 그런 공적에도 불구하고 분단 현실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이들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었다. 남북 대결은 북한 정권을 도운 인사를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표창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계라 할지라도 북한 정권 수립과 무관하면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표창해왔다. 가까운 예로 얼마 전 김일성의 삼촌 김형권과 외삼촌 강진석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사회주의계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1960년대 공산당원이었던 김준연이나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이동휘를 표창한 데까지 올라간다. 2005년경부터는 북한 정권에 협력하지 않은 경우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데 문제가 없다는 원칙을 거의 확립했다. 그러나 김원봉·김두봉같이 자진 입북하여 그 정권을 도운 경우까지 포상의 범위를 넓히는 것은 쉽지 않다.

북한에도 남한의 독립유공자와 같은 ‘애국열사’가 있고 신미리에는 ‘애국열사릉’이 있다. 1991년에 229기이던 것이 2003년경에는 531기로 늘어났는데(<북한 정치사 연구 I> 김광운 지음), 여기에는 김삼룡, 김종태, 김달삼, 리덕구, 리현상 등 남한 출신 인사들과 엄항섭, 윤기섭, 조소앙, 조완구 등 납북 인사도 있다. 김원봉·김두봉은 혁명열사릉이나 애국열사릉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두 분이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훈을 남겼으나 북에서도 외면되었다면, 남쪽 출신인 그들의 혼령은 지금도 남북한을 배회하며 휴식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어찌 그들뿐이겠는가.

해방 73년에 남북 정부가 들어선 지 70년, 올해에만 세 번 남북정상회담을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남북 정부가 이런 문제를 법과 제도에 얽매여 실무적 차원의 포상기준 개선으로 풀지 못한다면, 일종의 민족적 합의와 결단을 통해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념이나 정파의 틀을 넘어 독립운동가들이 이 땅에서 편히 쉬도록 고민하자는 것이다.

몇가지를 생각해본다. 첫째, 정부가 어렵다면 민간 차원에서 기념사업 등을 통해 그들의 공적을 기리는 것은 어떨까. 그러자면 추진자들이 색깔론으로부터 보호받는 장치가 필요하다. 둘째, 남북 정상이 만나 항일독립운동을 민족적 차원에서 정리·발굴하는 조치를, 안중근의 유해발굴 공동계획처럼, 우선적으로 마련하는 길이다. 이를 위해서는 항일운동가들의 업적이 해방 이후 정치적·정파적 논란과는 분리되어야 한다. 일제강점 35년을 두 배나 넘긴 이 시점까지 남북 어느 곳에서도 안식처를 찾지 못한 영령들이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는데, 두 눈 제대로 박힌 후손이라면 누구라도 가슴 아파해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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