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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공포가 움직이는 신자유주의

등록 2005-12-11 17:39수정 2005-12-12 13:59

권태호 경제부 기자
권태호 경제부 기자
아침햇발
“지금부터 반장을 바꾼다. 이○○ 네가 반장이다.”

중학교 1학년 가을이었다. 우리 반은 사고뭉치 반이었다. 늘 시끄럽고, 반 성적도 가장 낮았다. 어느날, 화가 난 선생님은 말 한마디로 반장을 갈아치웠다. 새 반장은 공부는 못했지만, 힘이 가장 센 아이였다. 13살짜리에게 그날은 큰 충격이었다. 그때 나는 부반장이었다. 나는 부반장직을 유지했지만, 그날의 ‘거세’ 공포는 성장기 내내 나를 짓눌렀다.

1982년 시즌이 끝날 무렵, 김재박이 엠비시(MBC) 청룡 유격수로 입단했다. 그때까지 유격수를 맡았던 정영기는 이듬해 롯데로 트레이드됐다. 그때까지 롯데 유격수였던 권두조는 삼미 슈퍼스타즈로 트레이드됐다. 그때까지 ‘도깨비 타선’의 한 축이던 삼미 유격수 허운은 86년 퇴출됐다.

넉달 남짓 재정경제부를 출입하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소회는 우리나라 경제관료들 대부분이 신자유주의자들이라는 점이다.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극대화하는 최선은 ‘경쟁’이며, ‘개방’과 ‘탈규제’는 그 방법이다. 우리가 다 잘살기 위해선 세계화는 필연”이라는 것이다. 최근 경제흐름을 보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진보진영의 대응논리마저 궁색하게 만들 정도로 강력하고, 국경을 유유히 뛰어넘을 정도로 유연하다. 진정한 ‘자본’주의 시대가 꽃을 피우는 것인가? 스크린쿼터, 쌀협상 비준, 교육·의료시장 개방 등 민감한 문제도 “그럼, 대안이 뭔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소비자들에게 어느 게 더 유리한가?” 등 상황논리와 효율성 반박에 직면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사실상 ‘정글의 논리’인 신자유주의는 야만적이지만, 과학적 합리성으로 튼튼하게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른바 지식인들에게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하곤 한다.

평생 시골 구석을 벗어나본 적 없는 늙은 농부가 어느날 ‘미국 농산물과 싸워 이길 국제경쟁력’을 요구받는다. 달동네 가장 부자였던 구멍가게 아저씨가 부러웠던 아이가 자라 아파트로 변한 그 동네에 슈퍼 하나 차렸는데, 길 건너편 예쁜 단장을 한 24시간 편의점이 예의 ‘경쟁력’을 뽐낸다.

사자는 배가 부르면 눈앞에 토끼가 뛰어다녀도 그냥 내버려둔다. 그러나 표범은 배가 불러도 사냥감이 있으면 쉬지 않고 사냥하고, 낑낑대며 나무 위에 숨겨둔다. 먹이사슬의 가장 윗부분에 있지만, 늘 ‘여유’가 없다. 그런데 때로 우리 사회는 ‘사자’들도 ‘표범’처럼 움직인다. 그러다보니 가뜩이나 힘든 노루, 토끼들이 숨을 곳이 없다.

최근 여당이 종부세안을 일방타결했다고 한나라당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그런데 법안 통과로 내년에 서울 서초동 롯데캐슬 59평 아파트 소유자가 내야 할 보유세(재산세+종부세)는 286만원이다. 한나라당안이 통과됐더라면, 종부세를 안 내도 돼 231만원만 내면 됐다. 이 아파트 주인이 내년에 더 내야 되는 세금은 55만원이다. 한 달 평균 5만원이 안 된다. 그러니 좀 그만 해도 되지 않는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말 좀 해달라. ‘우리, 한 달에 5만원 더 낼테니 그걸로 다투지 말아달라’고.

왜 이렇게 그악스러울까? 압축성장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가 ‘허운’뿐 아니라 ‘김재박’마저도 카프카의 <변신>처럼 하루아침에 거대한 ‘벌레’로 변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거세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닌지? 신자유주의 원리인 ‘경쟁’ 그 뒤켠에는 승자마저도 자유롭지 못한 ‘공포’의 원리가 빅브러더처럼 꿈틀대고 있다.


권태호 경제부 기자 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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