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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익선동 디즈니랜드 / 배정한

등록 2018-11-02 18:03수정 2018-11-02 19:10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이번 학기 대학원 수업에서는 서울의 ‘뜨는 동네’들을 ‘일상의 환경미학’이라는 시선으로 해석해보고 있다. ‘~로수길’들과 ‘~리단길’들을 비롯해 성수동, 연남동, 익선동, 을지로 등 최근 핫플(핫 플레이스)의 미학적 공통분모가 무엇인지, 작은 단서를 찾아보자는 게 소박한 목표다. 텍스트보다 현장이 중요한 법. 몇군데 핫플을 대학원생들과 체험하는 중이다.

이번주 월요일엔 ‘인스타의 성지’ 익선동을 돌아봤다. 익선동 모르면 아재라는 세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 대학생 딸에게 드디어 힙한 익선동에 입성한다고 자랑했더니, 이미 한물간 동네 아니냐며 의아해했다. 3년 전만 해도 재개발만 학수고대하는 버려진 동네였는데, 핫플의 수명이 3년도 안 된다니. 그래도 한옥과 골목길이라는 정체성이 뚜렷한 익선동엔 뭔가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답사에 나섰다.

우선 종로세무서 8층의 직원 식당에 잠입해 서울의 마지막 한옥마을 익선동을 조감했다. 보고서도, 설명도 필요 없다. 1920년대에 만들어진 개량 한옥 단지가 어떻게 개발 시대의 광풍을 피해 화석처럼, 아니 엉성한 박제처럼 남아 종묘, 낙원상가, 운현궁 사이에 낀 한옥섬이 되었는지 한눈에 그 사연을 보여주는 조감 뷰다.

여러 블로그의 가이드대로 가맥(가게 맥주)으로 시작했다. 70년대 ‘근대화슈퍼’를 연상시키는 비좁은 가게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연탄불에 구운 쥐포를 낡은 자개밥상에 올려놓고 수제 병맥주로 시동을 건 후 골목 탐험에 나섰다. 이십년 전에 답사하며 목격했던, 종로 한복판에 도저히 존재할 것 같지 않은 누추한 주거지가 더 이상 아니다. 열개 이상의 형용사가 필요한 스펙터클한 풍경, 가히 별천지고 신세계다. 이미 한참 구식이 된 발터 베냐민의 개념 ‘판타스마고리’의 재림일까.

지붕, 기둥, 보만 남은 20세기 한옥의 껍질을 사이에 두고 세명이 나란히 걷기에도 좁은 골목에서 기차놀이가 펼쳐진다. 힙한 패션의 2030, 등산복 차림의 중장년층, 트렁크를 끄는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뒤엉켜 꼬리를 물고 걷는다. 개화기 양장을 차려입은 모던보이와 모던걸도 곳곳에 출몰한다. 망사 달린 모자와 짙은 원색 비로드 원피스를 빌려 입은 경성의 모던걸들 손에는 군만두와 파운드케이크가 들려 있다. 흙벽을 털어 통유리로 개조한 가게들 내부에는 짝퉁 조선 가구, 80년대의 다이얼 전화기, 일본식 벽지, 유럽풍 샹들리에, 동남아풍 소품이 뒤섞여 있다. 그 안에서 커피를 마시고, ‘테트리스’나 ‘보글보글’ 같은 추억의 전자오락을 한다. 오랜 시간의 켜가 자연스럽게 공존한다기보다는 연출된 시간의 파편들이 표피적으로 버무려져 있다.

프랑스인 셰프가 운영한다는 식당에 앉아 프랑스식 수프, 이탈리아식 파스타, ‘나이스투밋유’라는 이름의 세트 안주, 미국산 아이피에이(IPA) 맥주를 시켰다. ㅁ자 개량 한옥의 대청과 마당을 튼 공간, 벽의 일부는 일부러 깨트린 벽돌이고 다른 쪽은 가짜 노출콘크리트에 목욕탕 타일이다. 개화기의 마호가니 테이블에, 의자는 바로크 스타일이다. 본격 수제맥주 집을 거쳐 마지막 차수로는 에일 전문 프랜차이즈 맥주바를 택했다. 인테리어는 세 집 다 똑같다.

힙이란 무엇인가. 힙스터 문화는 익선동을 비롯한 최근의 핫플을 읽어낼 수 있는 키워드가 아니라는 데 의견을 모으며 마무리 건배를 했다. 상업적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억지 빈티지’나 ‘가짜 레트로 룩’이 총집결된 획일적 테마파크라는 잠정적 결론을 내리며 익선동 디즈니랜드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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