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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대한민국에서 수험생 부모로 산다는 것 / 이종규

등록 2018-11-14 17:38수정 2019-03-19 10:31

이종규
디지털영상부문장

10여년 전 교육부를 출입할 때의 일이다. 대입 정시 원서 마감을 몇 시간 앞두고 원서접수 사이트가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막판까지 눈치작전을 펴던 수험생들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서버가 다운된 것이다. 대학 입시를 ‘인생을 건 한판 승부’로 여기는 대한민국에서 ‘대형 사고’가 아닐 수 없었다. 학부모들의 거센 항의가 쏟아졌음은 불문가지다.

결국 교육부는 원서 마감을 하루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먹통 피시 앞에서 속이 타들어갈 수험생 처지를 생각하면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정상적으로 원서접수를 끝낸 수험생 부모들이 원성을 쏟아냈다. ‘왜 연장을 해주냐’는 항의였다.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 입시 공화국의 민낯이었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 다시 생각난 것은 아들의 수시모집 원서를 넣으면서였다. 경쟁률 추이를 봐가며 원서를 넣겠다는 아들에게 가급적 첫날에 다 마무리하라고 채근했다. 어차피 고려할 거라곤 뻔한 내신성적과 희망 전공밖에 없는데다 무려 6곳에 원서를 넣는데 눈치 볼 게 뭐 있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홀가분함도 잠시, 자꾸 경쟁률에 눈이 갔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한 곳이라도 미달이 됐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잠시나마 했었다. ‘내가 지원한 곳은 죄다 작년보다 경쟁률이 올랐다’며 낙담하는 아들 얼굴을 보니 면목이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수험생 부모로 산다는 것은 수험생 못지않게 괴로운 일이다. 자식이 ‘입시 전쟁터’에 나가 있는데 죄인 심정이 아닐 부모가 어디 있을까. 힘들어하는 자식을 보면 안쓰러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몇 점만 더 올리면 대학이 바뀐다’고 속삭이는 악마와 싸워야 하니 하루하루가 번민의 연속이다. 그렇다고 ‘공부가 다는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것도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는다. 세상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되뇐다. 공부가 다는 아니라는 말은 달콤한 거짓말이라고. 아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좋은 대학에 못 가면 루저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지닌 채 살아간다. 그러니 교실에서 엎드려 자거나 틈만 나면 게임을 하는 아이들은 스트레스가 없을 거라는 편견은 온당하지 않다. 불안감을 그런 방식으로 달래는 것일 뿐.

학부모와 학생들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불안감의 뿌리는 뭘까. 문제의 원인을 개개인의 탐욕에서 찾는다면 온전한 해법을 기대하기 어렵다. 인간의 삶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탄의 맷돌’(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이 우리 교육 시스템에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교육 담당 기자로서, 그리고 수험생 부모로서 지켜봐온 우리 교육문제의 근원은 학벌 체제, 곧 ‘학벌에 대한 과도한 보상 시스템’이다. 이 학벌 체제라는 맷돌에 빨려 들어가면 그 어떤 좋은 정책도, 선한 의지도 흔적도 없이 부서지고 만다. 대학 간판이 한 사람의 능력을 인증해주는 증명서이자 취업·임금 등 사회적 보상의 자격증으로 위세를 떨치는 한, 입시제도를 어떻게 바꿔도 달라지는 건 없다.

교육 담당 기자 시절 사석에서 지인들이 ‘입시제도를 어떻게 바꿔야 하냐’고 물어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곤 했다. “입시만으로는 교육문제 절대 못 푼다. 만일 서울대가 봉사활동 100% 전형을 실시하면 학생들이 밤새 봉사활동 하고 학교에선 다 엎드려 잘 거다. 부모는 ‘명품 봉사활동’ 찾느라 바쁠 거고.”

얼마 전, 아들은 수시에서 다 떨어지면 정시는 포기하고 재수를 하겠다고 했다. 정시는 너무 경쟁이 치열해서 지금 성적으론 ‘아무 대학’이나 가야 할 텐데, 그러면 그동안의 삶이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 것 같다고 했다.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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