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과 한국은 트럼프의 북-미 정상회담 리얼리티 쇼 욕구를 이용해 워싱턴 외교안보 기성 엘리트들인 ‘블로브’의 태업을 넘어야 하는 과제를 풀어야 한다.
선임기자 미국의 대표적인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 스티븐 월트 하버드대 교수가 문재인 대통령을 ‘2018년에 고마운 10가지’ 중 하나로 꼽았다. 문 대통령의 행보와 난관에 대한 평가다. 월트는 최근 <포린 폴리시>에 “문 대통령이 인내와 관용, 침착으로 큰 그림을 주시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며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가 꾸는 온갖 얼빠진 꿈에 조국의 운명을 기대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나, 그는 평화의 추구에서 거듭 창조성, 용기, 유연성, 인내를 보이며 지능적인 모험을 기꺼이 감수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월트는 “미국 대통령이 의미없는 홍보행사용으로 북한을 취급하는 대신에 문 대통령에게 도움을 준다면 좋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후 좀처럼 진도를 못 나가는 북-미 대화의 현실을 짚는 지적이다. 월트의 지적대로 트럼프는 자신의 치적 홍보용으로 북한을 이용하는 데 더 관심이 있다. 트럼프의 이런 한계는 그를 섬처럼 고립시켜 둘러싸고 있는 워싱턴 외교안보 엘리트들의 태업과 저항으로 증폭된다. 11월12일 미국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이미 알려진 북한의 삭간몰 미사일 기지 등을 미신고 기지로 확인했다는 보고서를 내고, <뉴욕 타임스>가 “북한이 숨겨진 기지에서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북한이 거대한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보도한 것은 극명한 사례다. 소설가 지망생이던 벤 로즈 전 버락 오바마 대통령 부안보보좌관은 이들 워싱턴 외교안보 엘리트들을 ‘블로브’(Blob)라고 지칭해 파문을 일으켰다. 블로브란 ‘덩어리’ 등의 뜻인데, ‘떼거리’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워싱턴판 적폐세력’이란 의미다. 로즈는 자신을 인터뷰한 2016년 5월 <뉴욕 타임스 매거진> 기사에서 블로브를 이렇게 묘사했다. ‘당파를 뛰어넘는 대외정책 엘리트’들이란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으나 “지금은 유럽과 중동에서 미국의 안보질서가 붕괴된다며 끊임없이 칭얼거리는” 힐러리 클린턴, 로버트 게이츠 및 그들의 온갖 아이비리그 출신 파리떼 같은 ‘워싱턴 하수구 거주자’들이다. 로즈의 견해에 따르면, 블로브의 상투적인 추정과 강경파인 척하는 가식은 미국을 국외에서 너무 많은 난장판으로 몰아넣었다. 점점 다극화되는 세계에서, 미국의 무한한 힘을 과대평가해서 자제가 필요할 때에 너무나 자주 행동을 요구했다. 월트와 존 미어샤이머 시카고대 교수, 배리 포즌 매사추세츠공대 교수 등 현실주의자들에 따르면, 냉전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은 ‘자유주의적 헤게모니’ 전략에 입각해 미국의 힘을 탕진하고 세계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미국이 그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자유주의적 가치를 가능하면 평화롭게, 필요하면 무력으로라도 전파해야만 한다는 ‘리버럴 헤게모니’ 전략은 이라크 및 아프간 전쟁 등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블로브들이 굳건히 집착하는 세계관이다. 오바마도 초기에는 ‘워싱턴 플레이북’과 절연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트럼프 역시 “완전한 이력서를 가졌으나 실패한 정책과 계속되는 전쟁 패배의 긴 역사에 대한 책임을 제외하고는 자랑할 것이 없는 이들”의 대외정책 충고는 받지 않겠다며 워싱턴의 “하수구를 청소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트럼프 역시 블로브의 워싱턴 플레이북에 젖어들고 있다. 미어샤이머 교수는 “트럼프는 기존 대외정책을 반대한 것이 당선의 큰 이유였으나, 재직할수록 거의 변화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고 워싱턴 플레이북을 기본적으로 추종한다”며 “실제적인 이슈에 집중하고, 그 이슈를 이성적이고 적합한 언어로 말하지 못하는 무능은 큰 문제다”라고 비판했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4일 “북한은 지금까지 약속에 부응하지 않았다”며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또 하나의 정상회담이 생산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본다”는 이상한 논리를 내세웠다. 북한이 약속을 안 지켰으면 2차 정상회담을 재고해야 한다. 게다가 이대로라면 고위급회담과 실무회담도 없이 막바로 2차 정상회담으로 건너뛸 수도 있다. 북-미 정상회담 리얼리티 쇼에 더 관심이 많은 트럼프, 이 리얼리티 쇼의 진행마저도 태업하는 워싱턴 블로브가 얽혀 만들어낸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한국은 트럼프의 리얼리티 쇼 욕구를 이용해 워싱턴 블로브의 태업을 넘어야 하는 과제를 내년에 풀어야 한다.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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