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정보와 가짜뉴스는 세계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해방 직후 모스크바삼상회의에 대한 오보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짜뉴스의 원조처럼 회자되고 있다. 이 오보는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미국이 제의한 신탁통치안을 소련이 제의한 것으로 왜곡했다.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거짓정보와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있다. ‘정보’가 은밀한 상태에 있는 것이라면, ‘뉴스’는 언론의 옷을 입고 그 ‘정보’가 드러난다. 최근 가짜뉴스라는 괴물이 날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가짜뉴스는 인간의 기대심리에 의지하고 믿고자 하는 개연성에 인간의 호기심을 덧칠하여 그럴듯한 가짜정보로 둔갑시킨다. 거기에 ‘~카더라’가 덧붙여지면 가짜뉴스는 날개를 달게 된다. 가짜뉴스는 대부분 그럴듯한 진실에다 아주 작은 부분의 거짓을 조합했기 때문에 반신반의로 출발하여 그 거짓됨이 명백히 드러나는 경우도 쉽지 않다. 그것이 인간 내면의 호기심·기만성과 어울리면 자기를 기만하게 된다. 언론의 자유를 빙자하여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날개를 단 이 괴물은 자신의 영역을 넓히면서 개인을 바보로 만들고 이웃을 이간질하며 공동체에 갈등을 부채질한다. 최근 횡행하는 가짜뉴스에는 청와대를 사칭하여 외교안보를 어지럽게 한 가짜메일 사건이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주장은 잊을 만하면 다시 도진다. 오래전부터 이 주장을 펴온 지아무개씨는 지난 4월에도 ‘5·18 북한군 침투설’을 주장하면서 ‘5·18’을 “북으로부터 파견된 특수군 600명이 또 다른 수백명의 광주 부나비들을 도구로 이용하며 감히 계엄군을 한껏 농락하고 대한민국을 능욕한 특수작전”이라고 폄훼했다. ‘북한군 침투’가 사실이라면, 이를 막지 못한 책임을 누군가가 져야 하는데,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은 그 사건을 그렇게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재판부는 지씨의 게시글이 “5·18 민주화운동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관련 지역, 집단, 개인을 비하하고 편견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고 판시했다. <전두환 회고록>도 5·18을 “북한 특수군의 개입”이라 써서 금서가 되었는데 이렇게 ‘5·18 북한군 침투설’은 당시 나라를 책임지고 있던 자기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고 있다. 최근 <뉴욕 타임스>는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보고를 인용해 북한 내 비밀기지 16곳을 위성사진으로 확인했다며, 올해 3월29일치 황해북도 황주군 ‘삭간몰 미사일기지’ 위성사진을 ‘큰 속임수’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는 북-미 간에 새로운 관계 수립과 북한의 비핵화를 협상하는 과정에서 보도된 것이어서, 북-미 대화에 의구심을 품은 미국 조야의 불편한 심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으로 간주된다. 이 보도에 트럼프는 ‘새로운 게 없고 부정확’하다며 ‘가짜뉴스’라는 딱지마저 붙였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가 어떤 곳인가. 미국 내에서도 록히드마틴·보잉 등 군수업체들이 후원하고 일본의 정부·기업·재단·개인이 기부하는 단체여서 미국 군수업체와 일본 쪽 목소리를 대변해왔으며, 실제로 2014년 11월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표기해 논란을 일으킨 단체가 아닌가. 국내의 보수매체들이 이 연구소의 후원자가 어떤 곳인지 모를 리 없을 터, 그런데도 그들은 이 연구소의 보고서와 그것을 베낀 <뉴욕 타임스>의 ‘가짜뉴스'를 대서특필했다. 비핵화가 무기시장을 축소할 것은 뻔한 일, 그렇다면 미국 무기를 가장 많이 구매한 한국의 무기시장이 위축될 것은 물을 필요가 없다. <뉴욕 타임스>가 미국 군산복합체의 시각을 반영한 전략국제문제연구소를 믿고 ‘과장·왜곡된 뉴스’를 만드는 동안 국내 보수언론들은 어땠나. 그걸 베껴 가짜뉴스를 양산하고 긴장을 높여 갔다. 가짜뉴스·거짓정보는 전쟁도 불사한다. 미서(미국-스페인)전쟁과 통킹만 사건 그리고 이라크 전쟁은 거짓정보와 가짜뉴스의 산물이다. 미서전쟁의 도화선이 된 메인호 사건은 미국의 신문왕으로 전쟁 선전·선동가이기도 했던 윌리엄 허스트와 조지프 퓰리처가 부풀렸다. 남북전쟁 때 전쟁기사로 판매부수를 늘렸던 두 사주는 전쟁을 조장하기 위해 미국의 개입을 촉구하는 과장된 기사를 내보냈다. 그들에게는 돈이 평화보다 중요했다. 통킹만 사건에서도 미국의 신문들은 한몫을 했다. 1964년 8월2일 베트남 연안에서 정찰을 하던 미국의 매덕스호가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고 보도했고, 이틀 뒤 매덕스호와 터너조이호가 공격을 받았다고 발표했지만, 뒷날 맥나마라는 이날의 공격은 없었다고 했다. 발생하지도 않은 피격을 빌미로 존슨은 대국민 선언문을 발표하고 베트남 수렁에 발을 디뎠다. 미국의 주요 신문들은 언론의 합리적 의심과 비판 기능을 방기한 채 정부 발표를 베껴댔다. 안보에 관한 한 국가의 결정이나 극단적인 주장은 어떤 검증도 받지 않은 채 사실이 되었다. 거짓정보는 이라크전에서 절정에 이른다. 미국과 그 동맹국은 이라크가 핵무기와 생화학무기 등을 개발하고 있다며 그 위협을 과장했다. 정보기관은 물론 싱크탱크와 전문가·언론이 동원되었다. 이라크는 장문의 보고서로 자신의 결백을 유엔에 호소하고 사찰단에도 의심 지역을 적극 공개했다. 당시 유엔의 이라크무기사찰단장이었던 한스 블릭스도 유엔 안보리에 참석해 대량살상무기의 흔적이 없다고 직접 보고했다. 대량살상무기는 그 뒤에도 찾지 못했다. 영국의 ‘이라크전 참전 진상조사위원회’가 발표한 칠콧 보고서는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정보는 과장·조작되었고 이 전쟁으로 15만명의 민간인이 죽음을 당했고 100만명이 집을 떠났다고 지적했다. 거짓정보에 따른 이 전쟁은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아직 참회조차 없다. 거짓정보와 가짜뉴스는 세계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해방 직후 모스크바삼상회의에 대한 오보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짜뉴스의 원조처럼 회자되고 있다. 일제 말기 폐간되었다가 1945년 12월 초 속간된 <동아일보>는 모스크바삼상회의와 관련해 “외상회의에 논의된 조선독립 문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이라는 그럴듯한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른 ‘가짜뉴스’였고, 이 오보는 한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김자동 회고록) 이 기사는 미국이 제의한 신탁통치안을 소련이 제의한 것으로 왜곡했다. ‘명백한 오보’요 ‘정보조작의 의도’도 감지되었으며 그래서 ‘오보(誤報)가 아닌 허보(虛報)요 왜곡보도’로까지 비판받는다.(김동민) 이런 상황에서 한국을 완전한 독립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미·소 양군 사령부는 2주일 안에 미소공동위원회를 구성하며,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최장 5년간의 신탁통치를 협의한다는 합의내용은 오간 데 없고, 소련이 주도하여 신탁통치를 하려 한다는 오보만 난무했다. <동아일보> 보도는 사실로 받아들여져 소련에 대한 강한 비난과 각계의 반탁성명이 줄을 이었다. 삼상회의의 내용 전체가 발표된 후 송진우같이 삼상회의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반탁운동에 조심스럽게 반응한 이도 있었지만, 민족지도자 대부분도 조선의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하는 반탁운동에 휩쓸리고 말았다. 미국과 소련의 주장이 뒤바뀌어 소개된 상황에서 반탁운동은 곧 반소운동과 반공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반탁-반소-반공 운동은 해방 직후 쥐구멍이라도 찾으려고 했던 친일파들에게 호기를 제공했고, 반공운동에 나서서 과거의 친일을 세탁해 애국자로 둔갑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오보’ ‘가짜뉴스’는 그 의도와는 달리 한반도 분단을 결정적으로 유도했고, 친일파들은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로 날개를 달게 되었다. 모스크바삼상회의 오보가 한 원인이 되어 그 뒤 후손들은 국토분단과 민족상쟁의 업보를 당했다. 그런 오보에 참여한 언론들이 아직도 참회하기는커녕 자신의 허물을 물타기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염치없고 볼썽사나운 짓이다.
연재이만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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