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탄력근로제는 일정한 단위기간 내에 평균 근로시간을 준수하는 것을 원칙으로, 기업의 필요에 따라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을 넘는 추가 근무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예를 들어, 2주 단위로 적용할 경우 일이 많은 첫 주에는 60시간 일하고 두번째 주에는 44시간 일해 평균 근로시간을 주 52시간으로 맞추는 식이다. 현재 탄력근로제의 단위기간은 최대 3개월이지만, 경영계는 집중근무가 필요한 업종을 중심으로 단위기간 확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여야는 이 문제를 연내 처리하기로 했으나 노동계의 강력한 반발 등으로 논의가 대통령 직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미뤄져 있는 상태다.
직업환경의학전문의(일터건강을 지키는 직업환경의학과 의사회 회원) 모교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였다.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내과 중환자실은 36시간을 연속 근무하고 12시간 휴식하는 형태로 한달간 일하는 근무 일정이었고, 근무 중에는 밤을 새우는 경우가 허다했다.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아마도 100시간 이상이었을 것이다. 한달이었지만 아직도 내 몸이 기억하는 시간이다. 얼마 전 수리 서비스를 하는 대기업의 협력업체 노동자를 상담하였다. 그는 아침 7시30분에 출근하여 저녁 8시까지 출장수리 업무를 수행하고 센터로 복귀하여 업무보고를 한다. 자체 시험을 앞둔 시기에는 추가로 한시간 정도 시험 준비를 해야 하고, 그때는 집에 들어가면 밤 열한시가 된다.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65시간에서 많을 때는 75시간까지 된다. 인턴 때의 경험이 떠올랐고 반사적으로 질문이 튀어나갔다. “일하다 죽을 것 같은 기분 들지 않으세요?” “빡센 날엔 정말 죽을 것 같아요….” 2015년 의학 저널 <랜싯>(The lancet)에 보고된 유럽과 미국, 호주의 노동자 60만3838명을 추적관찰한 연구에 따르면, 1주일에 35~40시간 일하는 노동자에 비하여 1주일에 55시간 이상 장시간 노동하는 노동자에게서 관상동맥질환 발생 위험이 1.13배, 뇌졸중 발생 위험이 1.33배 높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근무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위험은 더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장시간 노동은 급성 심장사, 관상동맥질환, 뇌졸중 외에도 고혈압, 당뇨병, 수면장애, 조산, 정신과적 문제, 근골격계 질환과 업무상 사고와 연관성이 있음이 지속적이고도 끊임없이 보고되고 있다. 올해 초 정부에서는 주 68시간까지 가능하던 근로시간을 연장근로 12시간을 포함한 주 52시간으로 단축하고, 특례업종을 축소하도록 법령을 개정하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연평균 노동시간 1763시간(2016년 기준)과 비교할 때, 한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이 2069시간으로 지나치게 높음을 인정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법 개정 필요성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현시점에서 삶의 기본권인 건강권을 위해 장시간 노동을 줄여나가야 한다는 상식적이고 당연한 내용을 인정하는 개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1년도 안 되어 정부는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기간 확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티브이, 라디오, 신문에서는 에어컨과 같은 계절산업, 프로젝트성 연구개발 사업 등에 대한 예시를 들어, ‘특정산업’에서의 어쩔 수 없는 단기간 장시간 노동의 필요성을 호소하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탄력적 근로시간제 확대의 논점은 “그동안의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확보받지 못했던 건강권을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키느냐가 핵심이다. 탄력적 근로시간제 기간이 1년으로 확대된다면 결론적으로 최장 6개월까지 1주 평균 64시간 일을 하는 노동자를 다시 합법적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정부안대로 탄력적 근로시간제 기간이 6개월로 확대되어도 3개월간 1주 평균 64시간의 노동시간이 합법화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2018년 초 개정된 근로복지공단의 뇌심혈관질환 업무상 질병 판정 지침을 따르면, 3개월간의 1주 평균 근무시간이 60시간을 초과하면 업무 관련성이 강하고, 1주 평균 52시간을 초과하면 업무 관련성이 증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3개월만 평균 60시간이 넘어도 산재의 원인이 되는 심각한 과로임을 정부도 이미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이는 정부가 정한 업무상 과로를 다시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모순에 빠진다. 과로에 대한 건강 안전망이 다시 후퇴하는 것이다. 더욱이 탄력근로제로 인한 실질임금 하락에 대한 우려 또한 존재한다. 극단적으로 말해 업무 성수기에 3개월간 1주 평균 64시간의 노동을 하고, 이후 3개월간 1주 평균 16시간의 노동을 한다면 초과근로 수당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다행히 교섭력이 있는 현장의 노동자들은 이런 극단적 경우에 대항이라도 해볼 수 있으나, 교섭력이 없는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은 이런 불이익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겪을 것이 분명하다. 정부가 현재 주도하는 탄력근로제 확대 논의는 장시간 노동을 하더라도 합의만 해두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정부의 메시지는 결국 제도적·행정적으로 직접적인 감시나 계도가 쉽지 않은 소규모 사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더욱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2016년도 전국사업체조사에 따르면 전체 종사자 중 65.0%가량이 50인 미만 사업체에 소속되어 있다. 2014년도 근로환경조사에 따르면 주당 55시간 이상 일하는 비율이 전체 노동자의 24%에 달한다. 이들은 상당 부분 소규모 사업장에 근무한다. 필자는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한 공공기관에서 50인 이하 사업장 노동자들의 건강 문제를 관리하는 업무를 하고 있다. 내게는 최근의 탄력근로제 확대를 둘러싼 논의가 ‘힘든 시기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너희는 건강 위험을 떠안고 살아도 괜찮다’는 무서운 합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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