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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크리틱] 안나의 서울, 기록 없는 도시 / 배정한

등록 2018-12-14 18:20수정 2018-12-15 14:29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가을과 겨울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던 어느 오후, 한국계 독일인 조경가 안나(가명)의 이메일을 받았다. 스위스의 한 명문 공대에서 박사논문을 쓰고 있는 그의 연구 주제는 남산, 낙산 등 서울 내사산(內四山)의 경관 변화에 대한 문화적 해석이다. 남산 연구의 한 갈래로 용산 일대의 경관을 다루고 있으며, 용산공원 설계에 대한 자료를 얻고 토론하고 싶다는 게 이메일의 요지였다.

보름 후, 드디어 안나를 만났다. 구글링을 통해 이력과 작품을 살펴보고 얼굴도 익힌 터라 처음 본 사람 같지 않았다. 그 역시 검색을 통해 이미 나의 면모를 스캔한 눈치였다. 사진보다 실물이 낫다는 둥 선의의 거짓말을 더듬거리는 영어로 주고받았다. 어색한 대화는 서울에서 태어나 유아기에 독일로 간 그의 개인사로 흘러갔다.

예상과 달리, 안나가 서울의 도시 경관을 학문적 관심사로 삼게 된 건 미지의 고향에 대한 갈증 때문이 아니었다. 프랑스 출신 지도교수 크리스토프 지로의 권유가 계기였다. 저명한 조경이론가 지로 교수는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2012년)의 심사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다. 용산의 경관을 읽어내기 위해선 남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심사 과정에서 깨닫고 다른 심사위원들과 격한 토론을 벌였지만 산에 대한 한국 고유의 개념을 끝내 파악하지 못한 채 돌아갔다. 그리고 안나에게 박사논문 주제로 서울의 산과 도시 정체성을 권했다고 한다.

이처럼 산이 지배하는 대도시가 있던가. 마침내 서울을 처음 방문한 안나에게 서울의 산은 학문적 열정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안나는 서울을 수차례 드나들며 남산을 비롯한 내사산에 대한 사료와 문헌, 계획 보고서와 도면을 수집했지만, 그 과정은 지난했다. 심지어 88올림픽 이후 남산 관련 사업들의 최근 자료조차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그 많던 계획의 결과물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는 서울을 상징하는 대표 경관에 대한 기록의 부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료와 기록에 토대를 둔 연구를 포기하고 직접 인터뷰에 나서는 쪽으로 방향을 튼 안나는 자비로 통역을 고용해 벌써 수십차례 남산과 낙산에서 시민, 공무원, 관계자를 만나고 있다.

눈에 띄는 대로 서울과 남산 자료를 모아 가방 한가득 챙겨주었다. 그러나 정작 안나가 내게 문의한 건 용산공원 심사의 상세한 기록이었다. 남산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해석 차이와 토론을 기록한 문서가 적어도 심사 진행을 맡았던 나에겐 있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공식적으로 남아 있는 건 작품집 한구석에 실린 반쪽짜리 심사평뿐.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안나는 미소를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중요한 프로젝트의 심사 과정을 기록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새하얀 머릿속, 흐르는 식은땀. 고작 내 입에서 흘러나온 변명은, “코리안 컬처.”

역사도시 서울. 기록 없는 도시를 역사로 수식하는 건 오만한 과장이거나 열등감의 포장이다. 지난주엔 서울의 공원 아카이브를 구축하고자 하는 자발적 연구 집단 ‘보라’를 초대해 세미나를 열었다. 일제 식민지기의 공원도, 최근에 만든 공원도 누가 언제 설계했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도면은 물론 문서도 남아 있지 않다. 사실 거창하게 서울 탓, 코리아 탓 할 일이 아니다. 고백하자면, 내가 근무하는 작은 학과에는 졸업생 명단도 없다. 석·박사 논문을 모아놓지도 않았고, 심지어 그 리스트도 없다. 반성하며, 새해맞이 새 노트에 네 글자를 적는다.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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