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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만열 칼럼] 3·1독립선언 100년, 지금은

등록 2019-01-31 18:17수정 2019-02-01 11:38

100주년을 맞아 ‘3·1운동’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한국의 민중민주운동은 19세기 농민운동에서 시작해 갑오동학혁명에 이르렀고 3·1운동, 4·19혁명, 광주 민주화운동, 6월 민주화운동을 거쳐 촛불혁명으로 연결되는데, 그 최고봉에 3·1운동이 우뚝 서 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100년 전 1919년 3월1일, 우리 선조들은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자주독립과 자주민임을 선언했다. 독립선언서의 첫 구절은 “우리(吾等)는 이(?)에 우리 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한다. 식민 치하에서 천하를 뒤엎는 듯한 우레 소리였다. 이 선언으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 평등의 대의를 똑똑히 밝히고,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토록 갖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선언과 함께 전국에서 민족독립의 장엄한 드라마가 벌어졌다. ‘3·1운동’ 혹은 ‘3·1혁명’이다.

이날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의 태화관과 파고다공원, 평양·신의주 등 지방의 7곳에서 일어났다. 봉화를 든 지 사흘째 되는 3월3일은 고종의 장례날, 의리로 본다면 이날은 잠잠할 줄 알았는데 예산·개성 등 7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월1일은 하루에 67곳에서 일어났고, 50곳이 넘는 날도 3일, 30곳 이상 일어난 날도 15일이나 되었다. 50명 이상이 참가한 곳만 집계한 일제 측 통계는 3~5월 1542회에 202만명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2000여회나 되는 집회에 1년간 1천만명이 넘었다는 증언도 있다. 사망자 7509명, 부상자 4만5562명, 피검자 4만9811명, 가옥 소실 724채, 교회당 소실 59채, 학교 소실 2개. 만세운동 피해가 모두 일제 측의 통계로 잡힐 수는 없었다.

3·1운동이 분출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세계사적으로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와서 신천지가 전개될 것’이라는 기대로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이 활발하게 움직였다. 무단통치하에서 생존권을 위협당하고 있던 때 비운의 군주 고종이 이해 1월22일 사망, ‘독살설’이 유포되고 있었다. 고종의 장례 전후에 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강점 후 언론·집회·결사의 자유가 박탈당하고 종교집회만 제한적으로 허락된 상황에서 ‘정교분리’ 정책은 역설적으로 종교인이 3·1운동의 주역이 되도록 만들었다. 3·1운동에서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대는 돋보였다. 교단별로 하고 있던 독립운동 계획이 2월에 들어서서 통합되었고, 이념·계층·지역에 관계없이 민족 전체가 동참하는 민족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100주년을 맞아 다종교 사회에다 계층 분화가 심한 현대사회가 귀감 삼아야 할 교훈이다.

3·1독립선언 전에 주권재민 이념과 조선의 독립·자유를 주장한 선언들이 있었다. 먼저 1917년 상해에서 신규식 등 14명이 대동단결 선언을 발표했다. 요점은 주권이란 민족 고유의 것으로 외국에 양여할 수 없다는 것, 1910년 8월29일 융희(隆熙) 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것은 백성에게 양여한 것이며 이제는 백성이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말하자면 대한제국 멸망과 동시에 주권이 백성에게 넘어갔다는 ‘주권양여설’과 ‘주권재민설’이다. 1919년 2월 초순에도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대한의 완전독립과 평등 권리를 대대로 전하기 위해 이족(異族)전제의 학대와 압박을 벗어나 대한민주의 자립을 주장했다. 이어서 1919년의 2·8독립선언과 3·1독립선언이 나타났다. 조선인의 독립의지와 주권재민 사상은 확립되었고, 민주공화정 이념은 실현 단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3·1운동이 민족사에 끼친 공헌은 크다. 복벽(復?)주의를 극복하고 그때까지 다소 부진했던 독립운동을 통합, 활성화했으며 무장독립투쟁을 본격화시켰다. 1920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은 그 첫 열매다. ‘독립을 선언’한 조선 민중은 후속 조치로 나라를 새로 세우려고 했다. 그것이 백성이 주인인 나라 대한민국이다. 재판을 받던 민족대표들은 어떤 나라를 세우려고 했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우리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려 한다고 당당히 말했다. 3·1독립선언에 따라 13도 대표 29명이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모여 1919년 4월11일 ‘대한민국’을 국호로, 헌장 제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에 나랏일을 맡겼다.

3·1운동은 민족사뿐 아니라 세계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100여일밖에 되지 않은 때에, 조선인은 3·1운동을 통해 자기에게 해당되지 않는 ‘민족자결주의’라는 ‘복음’을 스스로에게 적용하려 했다. 선언서는 “신천지가 눈앞에 전개되고 위력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하여 민족자결주의에 대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 일본을 포함한 전승국 식민지에는 적용될 수 없었고, 더구나 비유럽·비백인계·비기독교계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3·1운동은 그런 불가능을 기회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전승국 일본에 항거해 전승국 중심의 베르사유 체제에 도전했던 것이다. 그런 강력한 도전이 중국을 비롯한 약소국가의 반제독립운동에 큰 자극을 주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인류의 평등과 민족의 자존 및 세계의 평화를 강조했다. 선언서는 조선의 독립이 동양 평화와 세계 평화에 직결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함분축원(含憤蓄怨)의 2천만 조선인을 위력으로 구속한다는 것은 동양 평화를 영구히 보장하는 길이 될 수 없다. 동양 안위의 주축인 중국이 일본에 대해 두려움과 의심을 짙게 갖는 것도 동양 평화를 어지럽히는 멸망의 길이라고 경고한다. 조선이 정당한 생존권을 얻어 독립하는 것이야말로 일본과 중국으로 하여금 동양 평화의 담지자 역할을 감당케 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때문에 조선의 독립은 동양 평화의 핵심이 되며, 동양 평화로 그 중요한 일부로 삼고 있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주독립을 위한 조선의 3·1운동은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조선과 동양의 평화를 위한 운동이며,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운동임을 확실히 했다.

100주년을 맞아 ‘3·1운동’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한국의 민중민주운동은 19세기의 농민운동에서 시작하여 갑오동학혁명에 이르렀고 3·1운동, 해방 후의 4·19혁명, 광주 민주화운동, 6월 민주화운동을 거쳐 촛불혁명으로 연결되는데, 그 최고봉에 3·1운동이 우뚝 서 있다. 최근 3·1운동을 ‘3·1혁명’으로 명명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3·1혁명’이란 용어는 해외 독립운동세력이 즐겨 불렀고, 1944년에 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 서문에는 아예 ‘3·1대혁명’이라 했으며, 해방 후 이승만과 김구도 ‘3·1대혁명’이라고 불렀다. 제헌헌법 초안에 ‘3·1혁명’이라 한 것이 본회의 심의 과정에서 ‘3·1운동’으로 바뀌었다. ‘3·1혁명’에서 말하는 ‘혁명’은 전형적인 체제변혁이 아니라 오랫동안 계속된 봉건왕조체제를 주권재민의 체제로 바꾸었다는 거시적 관점과, 민족 전체가 궐기했다는 점이 복합적으로 함축된 의미다. 정명(正名)의 문제는 앞으로 시간을 두고 연구·검토할 과제다.

자주독립을 선언한 지 100년, 유엔을 가탁한 동맹 갑질을 보면서 착잡한 심경을 금할 수 없다. 독립국가라면서 거의 70년간 행사하지 못하는 전시작전권, 이를 환수하자는 주장만 나와도 호들갑을 떠는 장성·정치인·식자·정당이 있다. 철도·도로 연결과 개성공단·금강산·방위비 문제까지 피부로 느껴지는 외세의 간섭에도 입 다문 언론을 대하면서, 100년 전 일제의 총칼 앞에서 맨주먹으로 자주독립을 외친 그 기개가 어디로 가버렸는지 부끄러워진다. 1943년 11월 테헤란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한국의 완전 독립을 위해서는 40년의 수습기간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그 두배 가까운 시간이 되어가는데도 자주독립국가의 모습이 이 지경에 머물고 있으니, 후세 역사는 이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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