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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지석의 화들짝] 시대의 담론 ③, 독립 민주공화국의 꿈

등록 2019-02-19 17:41수정 2019-02-19 19:07

임정이 민주공화국을 담보하는 주체이긴 했으나 민주주의는 취약했다. 지도력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데다 여러 파벌의 이견을 조율하기도 쉽지 않았다. 당시에 통합적인 독립운동을 꾸려갈 정도로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면 우리나라의 이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1920년대 전반은 현대 한국의 원형이 나타나는 시기다. 지금 우리 모습을 과거로 추적해가면 당시 담론에 가닿는다. 그 첫째가 민주공화국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민주주의 원칙을 받아들였으나 통합을 이뤄 국민적 역량을 확장하지 못하는 한계도 그때부터 나타난다.
3·1혁명(3·1운동)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분수령을 이루는 대사건이다. 역량 있고 독립된 근대 국가를 만들려는 모든 움직임이 3·1혁명으로 수렴되고, 이후 모든 노력이 이 혁명을 토대로 뻗어나간다. 혁명이 일어난 1919년부터,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지고 일제가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을 시행하는 1925년까지 시대적 담론이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3·1혁명과 관련한 사망자는 수만명에 이른다.
일제 집계만으로도 3~5월 7500여명이 피살되고 5만명 가까이 다쳤다. 시위 참가자는 이 기간에만 적어도 200만명이나 된다. 1년으로 폭을 넓히면 전체 인구의 절반 규모인 1천만명까지 추정되기도 한다. 이 혁명을 통해 우리나라는 지구촌 민족해방 운동의 앞자리에 서게 된다.

3·1혁명이 낳은 첫 성과는 임시정부가 만들어져 민주공화국을 수립한 것이다. 혁명이 진행 중이던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의정원(의회)이 통과시킨 임시헌장(헌법)의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했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왕정·제정 시대가 끝나고 민주공화국 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민(인민, 민중, 국민)이 스스로 다스리는 공화국 중에서도 평민이 중심이 되는 나라가 민주공화국이고, 귀족이 중심이면 귀족공화국이다. 임정을 만든 이들은 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민주공화제라고 명시했고, 이는 현행 헌법의 제1조(“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이어진다. 임정은 이후 선언서 등을 통해 ‘우리 민족은 대한민국의 국민이요, 우리 민족을 통치하는 자는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니, 우리 민족은 영원히 일본의 지배를 받지 아니한다’라고 알린다.

당시 새로운 나라의 정체(통치 형태)를 놓고 큰 논란 없이 합의가 이뤄진 것은 그만큼 우리 국민의 역사·정치의식이 진전됐음을 보여준다. 3·1혁명이 ‘운동’이 아니라 ‘혁명’인 이유 가운데 하나다. 대한제국을 회복하려는 복벽 시도도 있었으나 임정 출범 이후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소멸의 길을 걷는다. 원래 정체 문제는 시대적 담론기의 마지막 과제가 되기가 쉽다. 모든 담론과 운동이 집약돼 새 체제 구축으로 귀결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 시기 담론이 정체부터 시작한 데는 식민 상태라는 현실이 크게 작용했다.

두번째 주제는 민주주의다.
우선 3·1혁명 자체가 민이 주인으로 우뚝 선 사건이다. 시위를 이끈 것은 학생을 비롯한 지식층이었으나 농민·노동자·상인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특히 농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한다. 이런 각성을 바탕으로 이후 민족운동은 노동자·농민 등 민중의 비중이 크게 높아진다.

임정은 일시적 기부금인 애국금과 인구세 수입으로 재정을 충당한다. 미주에서 오는 돈이 상당히 많았는데, 여기에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의 송금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국외 독립운동을 지탱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이 책임자로 있던 구미위원회는 지출 총액의 13%밖에 안 되는 액수를 임시정부에 보낸다. 임정의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이런 태도는, 그가 조선을 위임통치해달라고 미국 정부에 건의안을 보낸 일 등과 맞물려 1925년 3월 그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되는 원인이 된다.

임정이 민주공화국을 담보하는 주체이긴 했으나 민주주의는 취약했다. 지도력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데다 여러 파벌의 이견을 조율하기도 쉽지 않았다.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923년 초부터 5개월 동안 100여개 단체의 대표가 참여하는 국민대표회의가 상하이에서 열린다. 회의에서는 임정을 개혁해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자는 개조파와, 임정을 해체하고 새 독립운동 기구를 만들자는 창조파가 대립한다. 회의가 결국 결렬된 이후 해외 독립운동 세력은 이념과 노선에 따라 각개약진하거나 합종연횡하는 양상을 보인다. 당시에 통합적인 독립운동을 꾸려갈 정도로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면 우리나라의 이후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또 다른 담론은 외세와의 관계, 무엇보다 일제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다.
크게 넷으로 나뉘는데 무장투쟁론, 외교론, 민중혁명론, 자치론이 그것이다.

무장투쟁론은 이전 시기의 비타협적 위정척사파와 민족적 급진개화파에 뿌리를 둔다. 여기에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사회주의 이념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좌파 무장투쟁론이 가세한다.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고려할 때 무장투쟁론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갖는다.

이승만이 대표하는 외교론은 무장투쟁보다 강대국 정치를 활용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강대국을 전제로 하는 사대외교 전통과 국제 공법질서를 앞세우는 근대 국제정치를 결합했다고 할 수 있다. 임정은 무장투쟁론과 외교론을 아우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다. 무장투쟁의 주도권은 임정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만주 지역 독립운동 세력으로 넘어갔고, 외교 또한 통합적이고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민중혁명론은 국내 민중의 힘을 결집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움직임이다. 이 시기에는 막연한 담론으로만 존재했으나 이후 공산당 등 좌파의 기본 노선이 된다. 일제의 모진 탄압으로 그 시도가 성공하진 못했지만 민중을 각성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자치론의 뿌리는 1910년대의 문명적 국수보존론(國粹保存論)을 계승한 문화가치론이다.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제국주의 나라들이 내세우던 ‘문명’의 한계가 드러났고, 그에 대신해 ‘문화’가 주목받는다. 문화가치는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것으로, 일제의 인위적인 동화 시도에 맞서 조선의 민족문화를 선양하면 민족의 독자성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이 문화가치론이다. 민족주의 우파가 내세운 이런 타협론은 독자적인 조선학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으나, 일제 말기로 갈수록 친일 성격이 짙어진다.

마지막으로 문명화(근대화)를 둘러싼 담론이 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 병합한 뒤 이를 합리화하는 논리의 하나로 문명화 논리를 내세운다. 한반도는 문명 수준이 낮아 자율적 역량이 부족하므로 일제의 통치는 순리라는 강변이다. 일제는 그러면서도 1910년대의 무단통치기에는 한반도의 근대화를 억누르는 정책을 편다. 그러다가 3·1혁명을 계기로 일본과의 동일화 수준을 높이는 정책으로 바꾼다. 이런 상대적으로 열린 공간에서 우리 스스로 문명화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담론이 제기된다. 그 뿌리는 이전 실력양성 운동과, 주로 일본에서 공부하거나 일본 자본의 영향을 받은 신지식층·신자본가층에 있다. 길게 보면 개화 초기부터 이어진 자강론에 맥이 닿는다.

문명화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민족적 역량을 키운다는 과제가 식민지 시기라고 해서 사라질 수는 없다. 그 노력의 결과를 무조건 ‘식민지 근대화’로 매도해서도 안 된다. 실제로 1920년대 초기부터 민족자본과 근대 민족문화라고 할 수 있는 토대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해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을 바꾸는 데 기여한다.

문제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후 일제와 동화하면서 민족개조론이나 내선일체론 같은 식민주의 논리에 빠져든 점이다. 이들은 자율성과 주체성을 버리고 물질적인 생산력 향상에만 집중함으로써 국민경제 형성이라는 과제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이런 태도는 핵심 과제인 토지개혁을 거부하는 등 국민 다수의 삶에 무관심한 반민중적 근대화 논리로 이어진다.

1920년대 전반은 현대 한국의 원형이 나타나는 시기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 모습을 과거로 추적해가면 당시 담론에 가닿는다. 그 첫째가 민주공화국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민주주의 원칙을 받아들였으나 통합을 이뤄 국민적 역량을 확장하지 못하는 한계도 그때부터 나타난다. 외세에 대한 다양한 태도는 이후에도 우리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된다. 권위주의 근대화의 뿌리가 되는 ‘식민지적 문명화’도 이때 등장한다. 이런 모습은 이후 일제의 모순이 심화하는 가운데서도 틀이 크게 바뀌지 않으면서 1945년 해방 때까지 이어진다.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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