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미국과 세계는 진실의 순간에 직면해야 한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냐, 아니면 국제적인 핵 비확산 체제를 포기할 것이냐 양자 중에 택일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보수 우파들의 주장처럼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과 세계는 이제 핵확산금지조약(NPT)으로 상징되는 국제적인 핵 비확산 체제의 붕괴를 재촉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재건을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만들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1970년 핵확산금지조약 발효로 시작된 국제적인 핵 비확산 체제는 현재 붕괴 중이다. 핵무기가 공인된 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 5대 핵 강국 외에도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핵 비확산 체제에 따라 핵무기나 그 개발을 포기한 우크라이나나 리비아 안팎에서 장탄식의 후회가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러시아에 크림반도를 합병당하는 등 이렇게 시달리겠느냐고.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나토의 공습으로 무너지겠느냐고.
미국의 ‘모의 전쟁’ 전문가인 폴 브래큰 예일대 교수는 <제2차 핵 시대>에서 강대국이 핵무기를 독점한 1차 핵 시대가 끝나고, 이류 국가로 핵무기가 확산하는 2차 핵 시대를 선언했다. 그는 1차 핵 시대는 “꼭 핵폭탄을 터뜨리지 않고도 핵무기를 창의적으로 사용할 방법은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알려줬다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핵무기는 적의 선제공격을 단념시키거나 의사소통과 협상의 목적으로, 국가 간 동맹 강화에, 자국의 독자적인 외교노선 확보를 위해 이류 국가들에 의해 개발됐다. 이제 북한이 이를 현실로 보여주는 ‘3차 핵 시대’를 알렸다.
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북한이 그 극명한 예다. 더 큰 문제는 이들 국가의 핵무기 개발이 미국에 의해 묵인되거나 야기됐다는 것이다. 인도에 맞서는 파키스탄의 핵 개발은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서 파키스탄을 그 전진기지로 만들기 위해 묵인됐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아프간에서 소련 퇴치를 위해서라면 파키스탄의 핵 개발도 용인해야 한다는 제안을 했다. 파키스탄의 핵무장은 그 뒤 북한과 이란의 핵 개발 등 냉전 이후 미국의 최대 안보 현안이던 핵 확산 문제를 야기한 모델이었다.
이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미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패권 질서를 어떻게 유지하려 하는지이다. 미국 패권 질서의 한 축은 분명 핵 무력이다. 지금 북한처럼 미국을 상대로 ‘맞짱’을 뜨는 현실이 보편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핵 독과점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미국 패권 질서의 또 다른 축은 군비 확충이다. 과거 소련의 붕괴를 재촉한 미국의 군비 확충은 경쟁국에 엄청난 비용과 체제 불안을 야기한다. 군비 확충엔 명분이 필요하다. 북한과 이란의 핵 개발이 한국에서 사드 배치 등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D) 구축의 명분이 되어왔다. 미국은 이제 핵 독과점 체제 붕괴를 감수하고라도 군비 확충 노선으로 나갈지, 아니면 핵 독과점 체제 유지를 위한 첫 단추인 북한 비핵화에 올인할지 선택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전망을 엇갈리게 한다. 이전의 어느 행정부보다 북한 비핵화에 매진하기도 하지만, 노골적인 군비 확충 노선으로의 경도도 보인다.
이란의 핵 개발을 제어하는 국제 핵협정인 포괄적 공동계획을 일방적으로 파기했고, 군축 사상 가장 소중한 협정으로 평가되는 중거리핵전력조약(INF) 이행 중단을 발표했다. 러시아는 즉각 극초음속 미사일, 핵 추진 무인 수중 드론 등 기존의 방어 체계를 무력화하는 무기 개발로 응수하고 있다. 물론 군비 경쟁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최종 승자는 미국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핵 비확산 체제까지 허무는 군비 경쟁에서 격화될 긴장과 우발적 사고는 미국 패권 질서에 예기치 않은 구멍을 낼 것이다.
우크라이나나 리비아의 핵 폐기 모델은 실패했다. 오히려 핵 개발 욕구를 자극했기 때문이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됐다. 북핵 폐기를 놓고 북한과 미국이 제시하는 비용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 자신의 패권 질서를 떠받치는 핵 독과점 체제를 유지할 계산이 있다면, 북핵 폐기의 비용은 얼마가 되더라도 지나치지 않다. 문제는 미국 조야 전체가 과연 그런 전략 계산을 하는지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