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가치와 규범이든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이전 수십년 동안 차지해온 권위를 얻기는 쉽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비자유주의 질서는 다극화하는 세계에 상응하는 측면이 있다. 이 질서에서도 대국 사이 전쟁은 일어나기 어렵겠지만, 갈등은 이전보다 더 많아질 가능성이 크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자유주의·민주주의·시장경제·자유무역을 옹호하고, 이런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를 지원하며, 공통된 규칙·규범과 국제기구·동맹국·협력국 등을 통해 질서를 유지하는 국제 체제를 일컫는다. 한마디로, 서구의 이념·제도·규범이 지배하는 국제질서다. 특히 미국의 패권이 관철된 2차대전 이후 국제관계가 이에 해당한다. 이 질서는 지난 10여년 동안 이완·해체 조짐을 보여왔다. 그 배경에는 두가지 큰 흐름이 있다. 우선 비서구권이 팽창하면서 서구의 지배력이 떨어졌다.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 사건이 미국발 2008년 세계 경제위기다. 중국을 선두로 남아시아·동남아·남미 나라들의 빠른 발전은 서구적 가치와 제도를 상대화한다. 냉전 종식 이후 죽 그랬듯이 앞으로도 수십년 동안 지구촌 경제성장분의 대부분은 비서구권에서 나올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서구 자체의 자신감 상실과 내홍이다. 지금 서구권에서 포퓰리즘과 극우 민족주의에 시달리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다. 헝가리·폴란드 등 동유럽 나라들은 비자유민주주의를 공개적으로 내세워 자유민주주의를 흔든다. 역설적이게도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가장 강한 타격을 가한 나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이다. 이 국제질서의 핵심 토대였던 미국과 유럽 사이 대서양동맹은 이미 복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됐다. 조금 길게 보면 미국 유일 패권의 절정을 보여준 일방적인 이라크 침공(2003년)이 기존 질서에 대한 의문이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 비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아직 고정된 내용을 갖기보다 이전 질서를 부정하는 상대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몇가지 눈에 띄는 양상을 나타낸다.
먼저 트럼프 정부가 밀어붙이는 경제 국수주의와 네오콘(신보수주의)이다. 국제관계에서 신보수주의는 힘이 강해야 성립하므로 확산에 한계가 있다. 경제 국수주의는 성격이 다르다. 아직 미국처럼 무역전쟁을 먼저 도발하는 나라는 잘 보이지 않으나, 이주민 문제 등에서는 국수주의가 여러 나라에서 세를 얻고 있다. 냉전 시절의 진영 대결과는 다른 강대국 경쟁이 부활하는 모습도 선명하다. 무엇보다 미국과 중국은 이미 중장기 소모전에 돌입했다. 미국의 대중국 공격은 지금 진행되는 무역협상의 타결 여부와 상관없이 끈질기게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 지배세력 전체가 중국에 대한 경계심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도 미국에 굴복하는 순간 은폐된 온갖 국내 모순이 함께 불거질 수 있어 정면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 핵무기를 비롯한 강대국 사이 군비 경쟁 역시 새롭게 시작되고 있다. 지정학이 더 중요해지는 현상도 새 흐름이다. 서구권이 지구촌 전체를 통괄할 힘이 없는 이상 지역 강국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다. 관계 재편 과정에서 지역 나라들 사이 크고 작은 갈등이 불거진다. 이런 불안정은 지역 나라들이 새로운 균형을 찾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가치와 규범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싸움도 치열해진다. 우월한 것으로 여겨진 자유주의 국제질서 자체가 서구권 밖에서는 적용되기 힘든 환상이었다는 지적이 최근 들어 이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종교를 비롯해 전통적 가치에 뿌리를 둔 정체성 정치가 모든 지역에서 성행한다. 이를 두고 포퓰리즘이니, 권위주의니, 퇴행적이니 하며 비판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비서구권 나라의 다수가 지난 한세기 이상 동안 서구적 가치를 받아들여 온갖 실험을 해왔으나 확실한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식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은 예외에 속한다. ■ 비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앞날이 확실하지 않다.
어떤 가치와 규범이든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이전 수십년 동안 차지해온 권위를 얻기는 쉽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비자유주의 질서는 다극화하는 세계에 상응하는 측면이 있다. 이 질서에서도 대국 사이 전쟁은 일어나기 어렵겠지만, 갈등은 이전보다 더 많아질 가능성이 크다. 그 과정에서 기후변화와 불평등 등 지구촌 공통의 문제는 더 나빠지기가 쉽다.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선 바람직한 질서가 어떤 것인지를 상정하고 그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는 방안이 있다. 최근 미국 브루킹스연구소가 펴낸 ‘민주주의와 무질서: 새로운 지정학에서 영향력을 위한 투쟁’이라는 보고서가 그런 사례다. 보고서의 핵심은 ‘민주국가들의 새로운 동맹’ 결성으로, 네가지 내용을 포함한다. 각국의 민주주의 재생과 국제 의제 공유, 정체성 정치 및 이주민 논란의 치유, 유럽과 아시아에서 민주주의 수호, 비서구 민주국과의 협력 심화가 그것이다. 중국과 러시아 등은 맞서야 할 권위주의 국가로 설정된다. 전체적으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새롭게 포장한 듯한 내용이다. 현재 및 과거와 완전히 결별한 질서는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측면이 있지만, 문제는 이런 시도가 현실성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새로운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방향은 현 상황과 각 나라·지역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시간을 두고 서서히 균형을 찾아가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 등의 가치는 자신이 추구하더라도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고, 당사자가 스스로 길을 찾도록 하면 된다. 최우선 원칙이 돼야 하는 것은 평화다. 각 주체가 ‘평화 속의 발전’을 누릴 수 있고, 그 시기가 어느 정도 지나면 자연스럽게 새 형태의 질서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는 19세기 서구 나라들이 보여준 전통적인 세력균형과는 다를 것이다. 이미 세계화가 훨씬 많이 진행돼 각국이 긴밀하게 얽혀 있고, 선·후진국 사이 격차도 당시보다 크게 줄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지역 단위 협력이다. 동북아·동남아·남아시아·중동·아프리카·유럽·중남미·북미 등으로 나뉘는 지구촌의 각 지역은 내부 갈등 속에서도 통합이 진전되면서 세계사의 주체로 새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과거 서구 주도의 일방적 세계화에서 지역 역량 강화를 통한 세계화로 바뀌고 있는 셈이다. ■ 남북이 분단돼 사실상 냉전이 계속되는 환경에 사는 우리는 지구촌 질서 변화에 둔감한 측면이 있다.
북한 핵 문제에서 보듯이 모든 국제관계가 미국·중국 등 강대국과의 관계로 환원되기도 한다. 여기에 멈춘다면 변화의 종속변수에 머물게 된다. 국제질서의 변화는 그 의미를 파악하고 흐름에 맞게 대처하는 만큼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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