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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지석의 화들짝] 시대의 담론⑤ 군사주의와 산업화

등록 2019-04-02 18:07수정 2019-04-03 16:54

우리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 한국전쟁이 끝나고 7년 뒤인 1960년에 다시 시대의 담론기가 시작된다. 4·19혁명 때부터 65년 한-일 수교가 이뤄질 때까지다. 민주화운동이 이 시기의 문을 열었지만 득세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 전례를 찾기 어려운 군사주의였다. 군사주의는 힘과 위계를 중시하는 군사 문화를 우대하고, 이를 모든 분야로 확산하려는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 4·19혁명은 독재와 장기집권으로 치닫던 이승만 정부에 맞서 민주주의를 나라와 사회의 기본 원리로 재정립하려 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정치적 반대세력을 억압하고 지방행정을 장악하기 위해 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의 개정안을 1958년 날치기로 통과시킨 것도 모자라 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려고 온갖 불법·편법 행위를 자행한다. 시민의 힘이 이를 바로잡았지만 희생이 너무 컸다. 3·15 부정선거 날부터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4월26일까지 185명이 숨지고 수천명이 다쳤으니 말이다.

그 뒤 상황도 만족스럽지 않다. 학생 등 혁명을 주도했던 세력은 이전의 ‘이식된 민주주의’를 청산하고 ‘진정한 한국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을 지향한다. 하지만 혁명 직후인 7월 총선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는 부정선거·부정축재자 처벌과 민주개혁에서 소극적이거나 무능한 모습을 보인다. 정부는 이듬해 5·16쿠데타가 일어나자 거의 손을 써보지도 않고 정권을 넘겨준다. 민주화운동에도 강력한 제동이 걸린다.

4·19혁명은 민주화를 바라는 시민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감과 동력을 제공하는 원천이 된다. 그 에너지가 다시 전면적으로 되살아나 1964~65년 ‘굴욕적 한-일 회담 및 한-일 협정 체결 반대투쟁’으로 표출된다. 시위가 거세지자 정부는 계엄을 선포한다. 물리력을 앞세운 노골적 억압은 이때부터 군사독재 정권의 통치행태를 특징짓는 핵심 요소로 자리를 잡는다.

■ 전쟁 이전 10만명 정도였던 한국군 규모는 불과 몇해 만에 70만명으로 팽창했다. 미국이 원조를 줄인 1950년대 말에 10만명가량이 축소됐으나 1960년에도 인구의 2.4%를 차지하는 대군이었다. 군병력 감축이 논의되는 지금의 비율(1.2%)과 비교하면 얼마나 큰 규모인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장성급들의 나이가 30~40대여서 영관급 장교들의 인사적체가 심했다. 이들이 5·16쿠데타를 주도한다.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논쟁이 벌어진다. 그는 2년 정도 유지된 군정 때는 시민의 권리보다 행정적 효율을 중시하는 행정적 민주주의를 얘기하다가, 6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선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운다. 자주·자립을 강조하는 이 주장은 강조점이 민주주의보다 민족에 있다. 이에 맞서 야당 쪽이 박정희를 공산주의자로 공격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앞세우자, 박정희는 ‘민족 이념이 부족한 사대주의’라고 반격한다. 선거에서 박정희가 이긴 것은 민족 담론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민족주의는 근대국가에서 국민을 형성하고 통합하며 동력을 끌어낼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체제를 구성하기 어렵다. 민족주의를 가장 우선해 체제를 짠다면 인종 차별과 대외 팽창을 기본 원리로 하는 나치 정권 같은 형태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민족주의가 민권·참여·소통 등의 하위 범주라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지만, 박정희는 민족주의와 군사주의를 결합해 군사독재 체제를 만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부터 헌법에 명시된 민주주의는 어느 정치세력도 무시할 수 없는 정치이념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세력은 앞쪽에 수식어를 붙여 민주적 실천을 피해 가는 행태를 되풀이한다. 박정희는 1972년 사실상 파시즘 체제인 유신체제를 구축하면서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쓴다.

■ 근대 국민국가가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주요 근거는 민권과 민생이다. 기본적으로 민권과 거리가 멀었던 박정희 정권은 민생에 매달린다.

그는 산업화·근대화를 최우선 정책으로 밀어붙인다. 이 또한 군사주의와 결합한다. 정부 주도 경제개발 계획을 세우고 사실상 국유화한 은행을 통해 자원을 배분한다. 수입대체 산업화가 핵심인 1차 경제개발 5개년(1962~66년) 동안 투자재원의 72.2%를 내자에서, 27.8%를 외자에서 조달하는 것으로 계획을 짠다. 외화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이 기간에 연평균 8.5%의 고도성장을 달성한 것은 그 자체로 큰 성과다. 경제 성장은 당시나 이후에나 박정희 정권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강력한 수단이 된다.

앞서 외자와 특별 금융의 특혜 배분을 통해 틀이 잡힌 재벌 주도 경제구조는 더 심해지고, 상대적 빈곤은 더 악화한다. 군사주의적 경제 운용은 기업 경영에도 그대로 침투한다. 정부는 군대식으로 짜인 기업 조직과 손잡고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자원집중과 노동자 쥐어짜기, 강제저축과 내핍 등 하향식 국민동원을 일상화한다. 지금도 많은 흔적이 남아 있는 경제구조의 원형이다. 담론이라는 측면에서, 이런 박정희식 개발독재는 당시 심각한 도전을 받지 않은 채 정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 군사주의가 더 적나라하게 나타난 영역은 안보·외교 분야다. 북한의 위협을 빌미로 안보 위기가 강조되고 반공자유주의가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한다.

군사주의 유지·강화에는 적과 동지의 명료한 구별이 필수다. 그 정점에 북한과 미국이 자리한다. 남북 대결과 분단체제는 담론 대상이 될 수 없는 금기가 되고, 미국에 대한 비판은 친공·친북으로 매도된다. 무소불위의 공안기관인 중앙정보부는 간첩 사건을 수시로 터뜨린다. 한국군 감축을 압박하던 미국이 베트남전 참전을 요구한 것은 군사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된다.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1964년), 공병부대(65년)에 이어 65년부터 전투부대가 베트남에 투입된다. 파병과 관련한 대대적인 행사 등은 사회 전체의 병영화를 촉진하는 데 기여한다.

박정희의 군사주의는 냉전체제의 모순을 극대화해야 성립할 수 있었다. 미국은 한국을 냉전체제의 전초기지로 여겼고, 사실상의 한-미-일 삼각동맹을 구축하려면 한-일 수교를 서둘 필요가 있었다. 국민의 거센 반대 속에서 이뤄진 한-일 협정 체결과 수교는 군사주의를 강화하는 새로운 계기가 된다. 과거 청산 문제를 봉합한 채 한-일 협정이 체결되는 순간 민족적 민주주의는 민주뿐만 아니라 민족에서도 명실상부하게 사망한다.

■ 1960~65년은 현대 한국의 내용과 특성을 형성하는 여러 변화가 한꺼번에 일어난 기간이다. 시민의 잠재력을 여실히 보여준 4·19혁명에 이어 군사주의가 정착함으로써 이 시기의 담론과 행위는 모두 한계를 드러낸다. 당시부터 시작된 여러 모순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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