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지학원 이사장·전 국사편찬위원장 올해 4월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3·1운동이 천명한 독립·민주·평화의 실천자로 자임, 민주공화정을 국가이념으로 선포했고, 대한민국 정부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자임을 분명히 했다. 제헌헌법에서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언명한 것이나, 현행 헌법에서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못박은 것은 3·1정신이 임시정부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로 계승되었음을 확인한 법제화 조처다. 3·1운동을 통해 독립을 선언하자 국내외에서 몇몇 정부가 출현했다. 그중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상해)에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뒤 한성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 재탄생된 통합임시정부로 30년간 계속되었다. 통합임시정부는 한성정부의 정통을 잇는 한편 상하이 임시정부가 시작한 명칭과 전통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러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할 때, 100년 전 그곳 상하이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10일 밤 10시부터 열린 임시의정원이 건립했다. 임시의정원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부근의 큰 양옥에서 모였다. 이곳은 정부가 서면 청사로 사용하려고 빌린 장소였다. 잔디가 깔린 뜰에 여러 개의 방과 큰 식당도 있어서 이날 모인 이들도 건물을 보고 놀랐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현순·이광수 등이 보낸 전보와 편지를 통해 3·1운동 소식과 함께 상하이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상하이는 전부터 한국 망명객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동제사(1912)가 활동했고, 신한혁명당의 조직(1915)과 대동단결선언(1917)에 이어 1918년에는 신한청년당이 결성된 곳이다. 국내 독립운동과 가교적 역할을 위해 파견된 현순은 3·1운동이 일어나던 날 상하이에 도착해 이광수·여운홍·신규식·선우혁·김철 등과 ‘독립임시사무처’를 개설하고 그 총무로서 3·1운동 전개 상황을 파리강화회의 각국 대표들과 국외 동포들에게 전하는 한편 독립선언서를 영문·한문으로 번역해 널리 퍼뜨렸다. 베이징·노령 등지에서 상하이에 도착한 독립운동가들은 3월 말쯤부터 ‘정부조직론’과 ‘정당조직론’을 두고 논의했으나 4월 초까지 독립운동 최고기관의 조직 문제를 합의하지 못했다. ‘독립임시사무처’ 쪽이 국내의 의향을 참조해 정부조직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이동녕 등은 상하이를 떠나려고 했다. 현순 등은 4월9일 여관을 찾아다니면서 간곡하게 만류해, 4월10일 밤 다시 모이게 되었다. 이광수는 이때 모인 사람이 “간밤에 예배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반수밖에 안 되었으나 주요한 이들은 다 모인 셈”이라고 했다. 이렇게 어렵게 모인 29인이 임시정부를 수립한 주인공이다. 29인이 모였을 때 이광수는 임시정부의 수립이 늦어진 그간의 경위를 설명했다. 정부 수립을 위해 서울로 보낸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미주 국민회와 간도·노령 지방의 단체에서도 아직 사람이 오지 않았지만 더 늦출 수 없었다고 하고, 정부 수립에 관한 일은 오늘 모인 여러분들께 맡기고 자기들은 물러나 있겠다고 했다. 그러자 어떤 이는 “나는 가오” 하고 일어섰다. 이때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한위건이 문을 막아서면서 “못 나가십니다. 정부 조직이 끝나기 전에는 한 걸음도 이 방에서 못 나가십니다. 지금 국내에서는 수많은 남녀 동포들이 피를 흘리고 감옥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동포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시면 밤이 아홉이라도 이 자리에서 정부를 조직하시고야 말 것입니다”라고 했다.(이재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연구>) 현순도 그의 영문 자서전에서 이날 저녁의 상황을 “유능한 청년들이 목총(<현순자사>에는 권총)·목봉으로 무장하여 참석자들을 보호하는 한편 공정한 토론을 위해 질서를 유지”했다고 썼다. 이날 밤의 삼엄한 분위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탄생을 위한 산고를 의미했다. 임시의정원 제1회 모임은 이런 분위기에서 시작했다. 임시의정원 기사록(紀事錄)은 “대한민국 원년 4월10일 하오 10시에 개회하여 4월11일 상오 10시에 폐회”했다고 썼는데, 밤새 회의를 계속했다는 뜻이다. 회의 벽두에 조소앙의 제의로 이 모임의 명칭을 ‘임시의정원’으로 정했다. 이어서 여운형의 제안에 따라 무기명투표로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 서기에 이광수·백남칠을 선임했다. 임시의정원은 11일 새벽에 현순의 동의로 국호·관제·국무원에 대해 토의하기로 하고, 신석우가 제안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먼저 정했다. 최근우의 동의에 따라 ‘집정관제’를 ‘총리제’로 바꾸고, 국무원을 선임하여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재무총장 최재형, 교통총장 문창범, 군무총장 이동휘, 법무총장 이시영을 선출했으며, 이어서 각부 차장도 선출했다. 국무총리 선출 때 이승만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오자 신채호가 극렬히 반대했다. 이승만이 ‘위임통치 및 자치’ 문제를 미국에 제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이 구두로 호천(呼薦)된 3인(이승만·안창호·이동녕) 중에서 출석 회원의 3분의 2를 얻은 이승만이 국무총리에 당선되었다.
연재이만열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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