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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지석의 화.들.짝] 전환기, 어떤 질서를 만들어야 하나

등록 2019-05-28 17:29수정 2019-05-29 14:36

기존 질서는 아귀가 맞지 않아 삐거덕거리고 있으나 새 질서는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지구촌 전체가 그렇고, 나라 안도 마찬가지다. 새 질서의 뼈대는 앞으로 몇해 안에 형성될 것이다. 기존 질서란 수십년 이상 유지된 신자유주의 경제·사회 체제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말한다.

■ 중장기 전면전으로 치닫는 미-중 무역·기술 전쟁은 신자유주의 체제 말기 현상 가운데 하나다. 2008년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로 힘이 빠진 이 체제가 1·2위 경제대국의 정면충돌로 주춧돌부터 흔들리는 모양새다.

이 체제의 최대 수혜자인 미국과 중국이 붕괴의 주역이 된 현실은 역사의 역설이다. 미국은 1980년대부터 이 체제를 주도하며 1인당 평균소득을 2배로 높이고 금융자본과 첨단산업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중국은 다국적기업의 활발한 투자를 자국의 풍부한 노동력과 결합해, 불과 한 세대 만에 최빈국에서 세계 2위(구매력평가 기준으로 세계 1위) 경제대국으로 비약했다. 중국의 성장은 지구촌 빈곤 인구를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루 1.9달러(2011년 구매력평가 기준) 미만 수입으로 사는 극빈층은 1990년 세계 인구의 36%였으나 지난해 8.6%까지 떨어졌다.

이런 구조는 이제 해체되고 있다. 중국을 주저앉혀서라도 자국의 단기이익을 꾀하겠다는 미국의 공세는 지구촌 전체를 불확실성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와 맞물려 수십년 동안 3%가 넘는 무난한 수치를 기록해온 세계 경제 성장률 또한 2%대로 떨어질 조짐을 보인다.

신자유주의 시기에 전례 없이 심해진 계층 간 불평등과 산업 독점구조의 문제점이 더 크게 불거지는 것은 필연이다. 지금 지구촌에서 가장 잘사는 26명의 부는 하위 50%(38억명)의 그것과 맞먹는다. 금융자본과 다국적기업을 앞세운 신자유주의는 산업정책에 소극적이어서 전통 산업을 중심으로 대량 실업을 낳는 경향이 있다. 선진국의 일자리 감소와 중산층 몰락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이념 자체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켜 정치 격변으로 이어진다. 이런 모순이 미국에서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것은 내부 개혁에 소홀한 탓이 크다. 쇠락한 공장지대를 뜻하는 러스트벨트는 미국 경제의 상징처럼 됐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시도하는 ‘개혁 없는 전방위 통상전쟁’은 내부 모순을 더 심화할 뿐이다.

신자유주의 이후 체제와 관련해 두 가지 길이 제기된다. 기존 체제를 수정·보완하는 것과, 다른 원리에 따라 전면적으로 재편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새 체제가 어떤 이름을 갖든 현재의 심각한 모순을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세계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무엇보다 수십년 동안 심해진 불평등을 치유해야 한다. 여기에는 계층·지역·고용형태·선후진국 사이 불평등이 모두 포함된다. 2008년 위기 이전에도 30년 동안 100차례가량 지구촌을 휩쓴 금융위기의 가능성을 줄이고, 위기가 발생하더라도 큰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정부와 금융당국, 금융기관의 잘 조율된 노력이 요구된다. 환경문제를 악화시키지 않는 장치도 마련돼야 한다. 성장만 하면 환경은 나중에라도 고려할 수 있다는 생각은 용납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제자리를 찾아 경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포용적 구조의 구축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 국제질서 재편에는 미국이 어디로 향하는지가 중요하다. 다극화하는 추세 속에서도 군사·경제 측면에서 여전히 미국이 적어도 한 세대 동안 최대 강국 지위를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2020년 말 대선에서 트럼프 정부가 바뀌더라도 이전 자유주의 국제질서로 돌아가기는 몹시 어렵다.

이후 질서와 관련해 미국 안에서는 크게 두 길이 거론된다. 하나는 미국과 중국·러시아와의 ‘대국 대결’을 기본으로 하는 신냉전이다. 특히 중국과는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한다. 패권 도전에 집착하는 지금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지 못하면 앞으로 10년이 지나지 않아 미국의 지위가 흔들릴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방법은 과거 소련에 대해 그랬듯이, 폭넓은 반중국 연대망을 구축해 굴복시키는 길뿐이다. 중국을 완전히 무릎 꿇리지는 못하더라도 미국이 정한 규범에 복종하도록 해야 한다. 핵전력 외에는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러시아에 대해서는, 중국과 손잡고 미국에 맞서지 않는다면 타협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중국·러시아를 비롯한 중간 이상 강국들의 독자성과 상대적 힘을 인정하되 ‘자유롭고 개방된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질서의 내용은 ‘폐쇄된 영향력 지역의 억제, 바다와 우주라는 지구적 공공재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 유지, 정치적 독립성 옹호, 민주주의 촉진의 포기 및 좀 더 완화된 민주주의 지원 전략’으로 요약된다.(미라 랩후퍼 미국 예일대 교수 등) 구체적으로 중국에 대해 동아시아 지역을 자신만의 세력권으로 삼지 못하게 하고, 남중국해의 자유로운 통항을 유지하며,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민주주의 촉진의 포기’는 미국이 과거에 그랬듯이 민주주의 확산을 이유로 다른 나라에 무력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목표를 설정한다면 신냉전 체제와는 달리 유엔이나 세계무역기구 등 기존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많은 부분을 유지·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중국·러시아 역시 기존 질서에 불만이 있더라도 미국과의 정면 대결을 바라지 않는다면 협력할 소지가 다분하다.

트럼프 정부는 중장기 전략 구상에서 취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로 하는 행동은 신냉전 노선 쪽이다. 직전의 버락 오바마 정부는 ‘자유롭고 개방된 질서’에 가까웠다. 미국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두 가지 방식으로 국제질서 재편 실험을 해온 셈이다.

■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나 경제 측면에서나 질서 재편의 가장 앞에 있다.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직접적이고 전면적으로 영향을 줄 것이며, 이미 그 영향을 받고 있다. 그 속에서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고 한반도·동북아의 평화·번영을 꾀할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지만, 부작용은 다른 나라 못잖게 심하다. 소득 분배는 미국 수준으로 나빠졌고, 모든 분야에서 양극화가 심해졌다. 저성장 기조까지 정착해 질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갈수록 어렵다. 선진국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러스트벨트도 이제 경공업에서 조선·자동차 등 중공업으로 확산한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저출산·고령화 추세까지 합쳐져 내부 모순이 증폭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후 체제에 대한 모색에서 창의성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전통적인 국제관계 고수나 임기응변에 그치는 균형외교, 단기 성장만을 지향하는 정책으로는 길이 없다. 적어도 앞으로 10년 이상을 내다보는 큰 그림 아래 치밀하고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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