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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만열 칼럼] 독립유공자 서훈과 분단체제

등록 2019-05-30 16:57수정 2019-05-31 09:41

이만열
상지학원 이사장·전 국사편찬위원장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선열들을 더욱 생각한다. 독립유공자를 발굴해 서훈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정부에도 감사한다. 그러나 아직도 남북에 안식처가 마련되지 않은 독립선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한겨레> 칼럼을 통해 김원봉, 김두봉 두분을 이미 불러보았지만 허공을 치는 메아리였다.

광복 50주년 무렵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독립신문> 등을 참고하여 의병, 3·1운동, 임시정부, 의열 및 무장 투쟁에 참여한 독립운동가가 약 300만명이나 되었고, 그중 순국자가 15만명이나 된다는 조사가 있었다. 그때 정부에서는 독립운동가 4만여명의 색인을 만들고, 공적이 확인된 2만여명을 본격적으로 심의해 1400여명을 서훈한 적도 있다. 상하이 소재 임정 요원들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옮긴 것도 이때다. 그렇게 노력했지만 지금까지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이는 1만5511명뿐이다.

광복 75년인데도 독립유공자 서훈이 기대만큼 활발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분단과 전쟁으로 사람과 기억, 기록이 망실되었기 때문이다. 미군정 3년 이후 친일세력이 준동하는 상황에서 과거 의병 및 독립운동 유족은 요시찰의 대상이 되었고 기억과 기록은 보존되기 힘들었다. 동학농민혁명 후예들이 그랬듯이, 의병이나 독립유공자의 후예들도 조상의 행적을 떳떳이 드러내 보일 수가 없었다. 서훈이 부진했던 이유는 또 있다. 신청 절차다. 1960년대부터 문교부, 내각사무처, 총무처를 거쳐 1977년 국가보훈처가 서훈의 책임을 맡았지만, 독립유공자 입증은 국가가 아닌 개인이 거의 담당했다. 거기에다 일제가 작성한 불령선인(不逞鮮人)류의 서류를 통해야만 독립운동이 확인되는, 그래서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확인해주는 아이러니는 분노 그것이었다. 이 때문에 일제 말기에 장기 구금된 인사들은 자료 멸실로 독립운동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2005년부터 정부가 ‘전문사료발굴·분석단’을 조직해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면서 정부에 의한 독립운동 발굴이 본격화되었다.

독립유공자 심사와 관련해 먼저 한 원칙을 강조하고 싶다. ‘선독립 후친일’은 독립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으나 ‘선친일 후독립’의 경우는 독립운동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독립운동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 시점은 1945년 8월15일(혹은 개인의 사망 시점)인 셈인데, 그 시점에 친일을 했다면 그동안 아무리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그는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고, 그 전에 친일을 했더라도 과거를 뉘우치고 그 시점에 독립운동을 했다면 그는 독립유공자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이 확립될 때 독립유공자 서훈에 일관성이 유지될 수 있다. ‘후친일’은 어떠한 ‘선독립’도 덮어 ‘친일’로 규정될 수밖에 없고, 반대로 ‘후독립’은 어떠한 ‘선친일’도 넘어서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이 흔들려 공과의 총량만 따지고 선후를 가리지 않는다면, ‘선독립 후친일’의 경우 ‘선독립’의 공적이 ‘후친일’의 과오를 덮고 독립운동가로 평가될 위험성이 있다.

독립유공자 서훈에서도 아직 넘지 못한 벽이 있다. 분단체제다. 노무현 정부가 정부주도의 발굴을 강화하고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에 대한 포상의 길을 열었지만, 그중에서도 북한 정권에 관여하지 않은 경우에만 한 등급 낮춰 서훈했다. 2005년부터 권오설, 조동오, 김철수 등이 사회주의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았다. 그러나 많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은 분단체제 때문에 서훈에서 제외되었다. 100주년을 맞아 국민중심보훈혁신위원회가 사회주의계 독립운동에 대해 특단의 조처를 권고한 것은 의미가 있다. 위원회는 판단의 시점을 1945년 8월15일에 두고, 그때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면 그 전에 그의 사상이 어떠하든, 또 해방 뒤 정치적 행적이 무엇이든, 그 사람은 독립운동자로 판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몇년 전, 해방 전에 이미 숨진 김형권·강진석에 대한 서훈이 김일성의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재론된 적이 있다. 분단체제이기 때문에 독립유공자 서훈에 이런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독립운동 평가에 분단이란 변수가 등장하자 그 서훈은 ‘독립운동만’으로 평가될 수 없었다. 독립유공자 심사에서, 민족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지향했다거나 해방 뒤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했다고 해서 그 독립운동의 성격이 변질된 것이며, 그래서 달리 평가해야 할까. 사회주의 독립유공자의 경우, 그 사상과 처신이 서훈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독립운동은 그 자체만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문제의식 때문일까, 독립유공자 훈격 명칭(건국훈장·건국포장·대통령표창)에 유의하게 되었고, ‘건국’의 이름으로는 남북의 독립운동자들을 제대로 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런 명칭은 결과적으로 어떤 유파를 배제하는 듯했다. 독립운동의 가치는 분단체제에 앞선 통일적인 것이다. 남쪽의 ‘건국’, 북쪽의 ‘혁명’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뜻이다. ‘건국’의 틀 안에서 독립운동의 각 이념을 포용하고 분단의 벽도 넘어설 수 있을까. 독립유공자에게는 그 공훈에 합당한 상훈체계가 필요하고 그 법제화가 요청된다. 그것은 분단을 넘어서는 독립운동 서훈의 방안이었으면 한다. 분단을 핑계 삼아 서훈을 회피하고, 독립유공 선열들을 더 풍찬노숙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후손의 도리가 아니다.

국민중심보훈혁신위원회는 독립유공자 심사의 대원칙을, 사상이나 정치적 판단을 떠나 독립운동에만 적용해야 한다고 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최종적 평가 기준도 제시했다. 거듭하지만, 그것은 독립운동을 하며 옥고를 치렀더라도 1945년 8월15일(혹은 사망 시점) 현재 친일을 하고 있었다면 그는 독립유공자가 될 수 없고 반면에 친일행위를 했더라도 그 시점에 독립운동을 했다면 그는 독립유공자로 평가되어야 하며, 나아가 해방 뒤 정치적 행적이 어떠하든 그는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남북 어느 곳에서도 독립운동가로서 평가받지 못했거나 아직도 안식처를 찾지 못한 독립선열들을 편히 모실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위원회가 권고한 대로, 사상이나 정치적 이유로 독립운동을 온전히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당성을 높이는 길이다. 아울러 분단 초기 남북에서 숙청당한 이들의 독립운동도 해방 시점에서 판단해 정당한 예우를 갖춰야 한다. 6월 보훈의 달을 맞아, 분단으로 축소 왜곡되고 있는 독립유공자 서훈이 정선(精選) 확대될 수 있다면 이 또한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길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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