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개의 전쟁’은 냉전 종식 이후 미국 국방전략의 기본 틀이었다. 지구촌 2개 지역에서 동시에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이길 수 있도록 한다는 게 핵심이다. 전쟁 발발 지역으로 가장 먼저 꼽힌 곳이 중동과 한반도다. 이를 반영하듯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2년 초 중동의 이라크와 이란, 동북아의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했다. 이 전략은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시작된 긴 중동전과 2008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한곳에서 승리하고 다른 곳의 도발을 억제한다’는 내용의 ‘원 플러스’ 전략으로 바뀌었으나 한반도 전쟁이라는 가정 자체는 여전했다.
■ 이제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한반도에선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는 반면 중동에선 새롭게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수십년 동안 중동 지역에선 이스라엘과 아랍 나라들의 충돌, 민족주의 세력과 외세의 갈등, 현지 세력과 손을 잡은 강대국 사이의 대립, 각국 내부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과 분열 등이 복잡하게 얽혀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돼왔다. 지금은 대치선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미국과 이스라엘·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가 한쪽에 있고, 이슬람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이 반대쪽에 있다. 사우디와 이란 사이에 자리한 카타르·오만·쿠웨이트와 지역 강국인 터키는 양쪽과 거리를 둔다. 또 다른 강국인 이집트는 미국 쪽에 가깝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이런 구도를 만든 미국은 이미 여러 효과를 거두고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한 이스라엘과 아랍 나라 사이 대결이 희석되고, 이스라엘과 사우디가 전에 없이 가까워졌으며, 오랜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시리아 내전으로 손상된 미국의 이 지역 지배력이 강화될 터전이 마련됐다.
이 구도의 전제는 이란을 용납할 수 없는 악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를 위해 일방적이고 무리한 행동을 되풀이한다. 미국이 지난해 5월 이란의 핵 보유 시도를 막을 수 없다며 핵협정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한 것이 고비였다. 당시까지 이란은 협정을 잘 이행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란을 테러지원국으로 다시 지정한 데 이어 정규군 조직인 혁명수비대(IRGC)를 최근 테러단체 명단에 올렸다. 이제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까지 제재 대상이 됐다.
미국 쪽은 이란을 이라크·시리아·레바논과 묶어 ‘시아파 벨트’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세 나라 시아파는 각각 다른 국내 상황에 힘입어 세력을 확대했을 뿐 일방적으로 이란의 지시를 받는 조직이 아니다. 이란이 의도적으로 이들의 투쟁을 지원하기보다는 반시아파 세력의 공세가 이들과 이란 사이 협력을 유도한 측면이 강하다. 범시아파와 범수니파의 대립이라는 설정 자체가 정치적이다.
■ 앞으로 어떻게 될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전쟁에 상응하는 긴장 속에서 장기 대치로 가는 경우다. 지난 2년 동안 만들어진 신냉전 구도의 고착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이 유럽의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와 비슷한 ‘중동판 나토’ 구축을 꾀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란이 옛소련과 같은 ‘악의 제국’ 구실을 하고, 이라크·시리아·레바논 등이 이란의 위성국으로 설정되는 구조다. 현지 반이란 세력의 버팀목은 이스라엘과 사우디다. 대치선이 종교이므로 과거 냉전보다 더 오래갈 분열 구도다. 중동 사람들은 고통스럽겠지만 미국과 이스라엘로선 명쾌하다. 미군의 장기 주둔에 따른 현지인의 반발 문제도 한꺼번에 해결된다.
둘째는 전쟁이다. 미국은 이란 체제를 용납할 수 없다며 ‘최대 압박’에 이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하고 이란은 끝까지 싸우겠다고 맞선다. 타협의 여지가 보이지 않으니 논리적 귀결은 전쟁이다. 칼자루는 미국이 쥐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 없이 이란을 굴복시키고 싶어 하지만,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은 그렇지 않다. 볼턴이 대표하는 네오콘 강경파는 이라크전에 대해서도 지구촌 시민 다수와 생각이 다르다. 이라크 침공은 정당하고 필요한 것이었으나 부시 대통령이 전쟁을 잘 수행하지 못했으며, 뒤이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전쟁을 망쳤다고 본다. 이란을 굴복시키면 그때의 실패를 보상받고 중동에서 훨씬 나은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중동 지역 패권 유지는 미국 대외정책의 중요한 축이다. 방법은 정권에 따라 달라진다. 현지 세력을 활용해 갈등을 부추기고 분할지배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무력 개입도 항상 선택지에 있었다. 민주주의 확산, 근본 악을 막기 위한 최후의 전쟁(아마겟돈) 등이 뒷받침하는 논거로 사용된다.
■ 이란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지만 미국 역시 승리하기 어렵다.
이란은 침공 당시의 이라크에 비해 면적은 4배가 넘고 인구는 4배에 가깝다. 미군 수십만명을 투입해도 완전한 점령은 불가능하다. 유전 등 이란의 산업시설을 파괴하고 대외관계를 봉쇄해 스스로 무너지도록 해야 하는데, 40년 내전 속에서도 버티는 아프가니스탄 저항세력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수십년은 갈 것이다. 이란의 끈질긴 저항과 함께 국제 유가는 급등하고 중동 전역이 심한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공멸의 길이다.
미국 정부 안에서도 의견 일치가 돼 있지 않다. 국방부와 군부 인사들은 중국·러시아에 초점을 맞춘 대국 경쟁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들은 이라크전 이후 그랬듯이 테러 대응 등 비대칭적 전쟁에 계속 매달리다가는 중·러의 추월을 허용하게 될 것으로 우려한다. 미국 내 여론도 또 다른 중동 전쟁에 우호적이지 않다.
이런 분위기는 전쟁보다 신냉전 고착 쪽의 가능성을 높인다. 어느 한쪽의 섣부른 행동으로 국지전이 일어나더라도 전면전으로 확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냉전 역시 전쟁이다. 기존 문제는 거의 해결하지 못한 채 새 갈등이 깊어져 중동 전역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다.
■ 어떤 곳에서 전쟁 위험이 이어지는 것은 평화의 구조를 만들지 못했거나 그런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슷한 위험지역으로 여겨진 중동과 한반도·동북아의 가장 큰 차이가 여기에 있다.
미국과 중국은 지금 무역·기술 등 경제 영역에서 패권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군사 분야에서도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영향력 강화 경쟁을 한다. 남중국해나 동중국해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다. 한반도·동북아라는 지역 개념을 동아시아 전체로 확장한다면 평화 구조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이를 미-중 신냉전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냉전 시절처럼 한반도를 두 진영의 최전선 또는 우선 충돌 지점으로 보는 시각은 바뀌고 있다. 앞으로 동아시아에서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한반도는 아니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 그만큼 노력했고, 북한·미국·중국 역시 속셈은 다르더라도 상당 부분 호응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명확하게 합의된 형태는 아니더라도 평화를 떠받치는 기반이 넓어지고 있다. 북한 핵 문제 해결 노력이 되돌릴 수 없는 실천 단계에 접어든다면 항구적 평화 구조가 더욱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