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열
상지학원 이사장·전 국사편찬위원장
7월27일은 3년간 계속된 한국전쟁이 ‘휴전’한 지 66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3년 3월 초, 침울했던 교정에 별안간 ‘스탈린이 죽었다!’는 환호성이 터졌다. 육군병원으로 전용된 학교 운동장 한켠에 천막을 치고 60~70명이 들어가 수업하던 중3 시절, 소련과 스탈린을 두고 온갖 험한 말을 퍼붓고 있었기에 ‘스탈린이 죽었다’는 소식은 전쟁이 끝났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정전회담은 계속됐고, 1953년 6~7월에 10여만명의 젊은이를 더 희생시킨 뒤에 정전이 이뤄졌다. 수백만명을 희생시킨 비극 위에 성립된 휴전, 그 66주년이 되건만 우리는 분단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용서와 화해, 교류와 협력, 평화와 통일을 고민했는가, 원한과 복수를 다짐해왔는가. 최근 이웃에게 당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정전 후 우리는 어느 길을 걸었는지, 자성의 질문을 던져본다.
66년 전에 정전이 성립된 뒤 중립국 감독위원회의 철수 등의 변화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판문점에서 세계의 이목을 끄는 사건들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정전은 그다음 단계의 ‘종전’이나 ‘평화조약’으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1953년 7월27일 22시부터 발효된 휴전조약에는 한반도에 평화를 진척시키기 위한 내용이 있었다. 정전협정 제4조 60항에 명시된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삼개월 내에 …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 모든 외국 군대의 철수 및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건의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1954년 4월26일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참전 19개국이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의제는 한반도 통일을 위한 선거, 국제감독, 외국군 철수, 유엔의 권위 등이었다. 외무장관 변영태는 유엔 감시하에 토착인구 비례에 따라 자유총선거를 시행하자는 등 14개 항의 통일 방안을 제시했고, 북측은 외국군 철수, 남북한 병력 감축, 남북 정부 간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위원회 구성을 제안, 평화협정은 이때 이미 등장했다. 다른 참가국들도 평화·통일을 위한 의견을 개진했지만 그해 7월21일 성과 없이 폐막되었다. 이 회담은 남북한이 한자리에서 통일 방안을 논의한 최초의 국제회의였지만 어떤 합의에도 이르지 못했다.
남북은 그 뒤 미·소 진영에 각각 편입된 채 냉전체제의 최전방을 사수했다. 휴전선에는 끊임없이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남측의 북진통일론과 북측의 대남적화론이 대결했다. 남북이 세력균형을 이룰 무렵인 1972년, ‘7·4 공동성명’이 발표됐으나, 남북의 정권 담당자들은 이를 자신의 권력 강화에 악용했다. 남측의 유신체제와 북측의 사회주의헌법이 그것이다. 남측이 유신과 신군부 체제를 겪을 때 북측은 고려연방제로 공세를 취했으나, 소련과 공산권이 해체될 즈음에는 남북 고위급 대화로 서로를 인정하는 협정을 맺었다.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은 이런 배경에서 발표됐다.
1990년대 중반, 북의 핵 개발로 남북의 공존을 위한 의제는 북-미 간의 ‘핵 문제’에 밀리게 됐다. 북-미 사이의 길고 험한 핵 갈등은 제네바 협상에서 경수로 건설로 해결 단계에 들어간 듯했으나 뒷날 미국이 엎어버렸고, 6자회담을 통해 ‘9·19 공동성명’, 최근에는 싱가포르 회담에까지 이르렀으나, 미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이해관계 때문인지 미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미루고 있다는 의구심은 필자만의 것이 아니다. 북핵 문제가 국제화된 뒤 남북 문제를 민족적 차원에서 해결한다는 것은 더 쉽지 않게 됐다.
정전 이후 남측은 한-미 동맹을 뒷받침으로 하여 경제성장에 힘썼다. 산업화를 명분 삼아 독재와 군사정권이 등장했지만, 4·19에서 촛불혁명에까지 민주화 투쟁은 끊임없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인간의 창의성을 보장하는 민주화 운동을 병행했기 때문이다. 남측이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동안에 북측은 선군정치와 핵 개발에 매진했다. 그러나 분단체제 속에서 발전시켜온 남의 경제성장과 북의 핵 개발은 다 같이 제재를 받게 되었다. 앞으로도 남측이 경제성장을 통해 복지국가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을지, 북측 역시 ‘핵 보유’로 주체사상을 실현하고 인민의 평등을 성취할 수 있을지, 쉽지 않은 과제다. 최근 남측에 주어진 일본의 무역제재는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이 소재·부품을 자기에게 의존하도록 설계한 1965년 대일 청구권 수주 방식에서부터 치밀하게 계획했던 것이다.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 할수록 소재 산업은 대일 의존으로 수렴됐고 무역흑자가 늘어나는데도 대일 무역의 적자폭은 줄어들지 않았다. 거기에다 무역 외적 요인이 겹쳐지면서 이번 사건으로 터진 것이 아닌가. 이 사태가 소재·부품의 대외의존도를 줄이고 다변화시키며 국산화 비율을 높이는 계기가 된다면 전화위복이 따로 없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과 개성공단·금강산 문제에서 남북 화해와 한-미 동맹의 길이 일치되지 않아 주권국가의 한계를 절감하며 놀란다. 결국 군사주권의 문제라 할 전시작전권 문제와도 연결되는 것이 아닌가. 이는 임정이 중국 영토 안에서도 광복군의 독자적 지휘권을 행사한 것과 대비되고, 김유신이 나당연합군의 기벌포 작전에서 보인 자세에도 한참 못 미친다. 치열한 황산 전투로 신라군은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의 약속 기일을 어겼다. 소정방이 이를 빌미 삼아 신라의 선봉장 김문영을 처단하려고 하자 김유신은 결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모욕을 받을 바에야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대와 결전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삼국사기 5, 태종무열왕 7년조) 이런 결기는 동맹관계에서 가져야 할 기본 아닌가. 정부 수립 뒤 70여년간 동맹에 ‘헌납한’ 전시작전권은 서로의 부담을 덜기 위해서라도 그 이관을 서둘렀어야 했다. ‘대미 자주성의 회복을 통해 주권국가의 면모를 회복하는 것’(한홍구)은 빈말일 수 없다. 그래서 정전 66주년, 자주국방은 어디쯤에 와 있는지 묻는 것이다.
정전 체제하에서 별개로 보였던 한-미, 북-미 관계는 남북 관계가 겹쳐지면서 고차방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동맹은 남북 문제를 세계전략적인 차원에서 들여다보지만, 남북은 평화와 통일이라는 민족적 관점을 늘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민족사적 지향과 세계사적 전망이 어긋날 때 남북의 화해·통일의 길은 방향을 잃기 쉽다. 이럴 때 동맹을 설득하여 화해·통일의 민족적 지향과 조화시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66년이나 되었으면 자유왕래를 실현하고 조상의 무덤이라도 돌아보도록 하는 것이 남북에 정권이 존재하는 이유 아닌가. 먼저는 여론수렴을 통해 우리 속의 갈등과 분열, 증오와 원한을 지양하는 것이다. 화해와 용서는 남북·남남 공동체에 같이 실현돼야 할 우선과제다. 평화와 통일이 시급할수록 화해와 용서는 느린 듯하면서도 빠른 길이다. 정전 66주년은 그걸 일깨우는 한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