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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의길 칼럼] ‘바람보다 빨리 눕고, 일어서는’ 일본

등록 2019-08-20 09:30수정 2019-08-20 09:53

일본은 한반도를 향해 ‘바람보다 빨리 눕고, 일어섰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일본은 가장 빨리 올라탈 것이다.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집착은 역으로 우리가 일본을 움직이는 지렛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망하면, 한국은 가장 친일적인 나라가 된다. 한국은 귀여운 나라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다큐멘터리 <주전장>에서 한 일본 극우 인사는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인식을 잘 드러냈다. 한반도는 일본과 중국 사이의 종속변수이며, 중국이 약화되면 일본의 세력권이 된다는 것이다. 일본은 7세기에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 전후로 한반도를 대륙과의 관계에서 조명하며, 일본 열도의 안보와 세력 확장의 교두보나 완충지로 상정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임진전쟁,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출병’이라고 부르는 역사 인식을 보이는 맥락이다. 중국과 러시아에 맞서는 자위를 위해 한반도에 군대를 보내는 출병을 했다는 것이다.

한반도를 사이에 둔 대륙과의 관계에서 일본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일어났다’. 국력이 신장되고 주변 정세가 유리하면, 일본은 한반도를 거쳐 대륙 쪽을 향해 공격적인 침략 행태를 보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 뒤 임진전쟁이나, 19세기 말 강력한 중앙정부가 출현한 뒤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를 견제하려 하자 러일전쟁을 감행한 것이 대표적이다. 러일전쟁은 남하하는 러시아를 막으려는 영국이 일본을 부추겨서 지원한 대리전쟁이라는 성격도 있다.

반면, 안팎의 정세가 여의치 않으면 쇄국하거나 대륙 쪽에 적극적인 유화 정책을 펼쳤다. 통일신라 이후 조선 초기까지 열도가 분열됐던 시기에 한반도와 공식적인 수교를 맺지 않았고,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엔 미국의 하위 동맹국으로 재빠르게 순응해왔다.

대륙을 향해 ‘바람보다 빨리 눕고, 일어서는’ 일본의 대외정책은 1970년대 초 미-중 화해가 시작되자, 미국보다 한발짝씩 앞서 중국과 관계 개선을 추구했다. 중국과의 통상 등 경제협력 관계를 먼저 열며 대규모 원조를 제공했고, 결국 공식 수교도 미국보다 1년 이상 앞서 맺었다.

소련이 붕괴된 뒤 한반도의 냉전질서에도 변화 조짐이 보이자 미국보다 앞서 북한에 접근했다. 1990년 자민당의 실력자인 가네마루 신 부총재와 다나베 마코토 사회당 부위원장이 방북해, 조선노동당과의 3당 선언으로 수교 교섭을 시작했다. 미국은 핵개발을 하는 북한에 대한 일본의 접근은 속도위반이라고 제지했고, 그 뒤 가네마루 신의 실각은 이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뒤인 2002년에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해 평양 북-일 선언으로 국교정상화를 약속했다. 이 역시 조지 부시 당시 미국 행정부가 견제하자 납북자 문제 등을 이유로 바람보다 빨리 누워버렸다.

그 뒤 일본은 납북자 문제를 이유로 미국이나 한국의 대북 관계 개선을 막는 최대 걸림돌이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전후로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자, 아베 신조 총리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조건 없는 정상회담을 피력했다. 최근 한-일 분쟁의 계기가 된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한국 정부가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의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이에 대해 여권의 소식통들은 문재인 정부 이후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발목잡기로 일관한 아베 정부에 대한 불신감이 있었다고 전한다.

트럼프 행정부 이후 일본은 특유의 이중 플레이를 보인다. 오바마 행정부 이래 미국의 대중 봉쇄에 적극 참가한 일본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먼저 발의해, 미국의 아시아 전략으로 채택하게 했다. 미국의 대중 봉쇄 전략에 적극 가담하면서도 미국과의 수직적인 동맹에서 벗어나겠다는 의도다. 그러면서도 지난해 이후 아베 총리는 시진핑 중국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중-일 관계를 수교 이후 새로운 우호 단계로 발전시키고 있다.

동맹국에 부담을 전가하고, 동맹 관계를 회의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에 대한 자구책이면서, 미-일 동맹에 머물지 않는 ‘범 인도양·태평양 봉쇄망’에서 독자적인 위상과 역할을 제고하겠다는 것이다. 납북자 문제를 이유로 한 북한과의 관계 개선 방해, 북한과의 정상회담 촉구, 그리고 수출규제로 한-일 분쟁 촉발 등 일련의 대한반도 행보는 오락가락한다. 일본의 위기감의 표현이지만 바람보다 빨리 눕고 일어서는 일본 특유의 행보이기도 하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구축될 조짐만 보여도 일본은 누구보다도 빨리 올라탈 것이다.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집착은 역으로 우리가 일본을 움직이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지금의 한-일 관계는 위기이면서 분명 기회다.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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