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계급적’ 대입 제도, 이젠 바꾸자 / 김규원

등록 2019-08-28 17:40수정 2019-08-29 14:54

김규원
전국 에디터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를 둘러싼 논란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딸의 외국어고와 대학, 의학전문대학원 재학, 입학 관련이다. 이것이 이번 논란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계급’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자녀 교육에 가장 관심이 많고,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하는 부모들은 대한민국에 있다. 그리고 지구상에서 가장 열심히, 가장 긴 시간 공부하고,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내는 아이들도 대한민국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성실한 대한민국의 부모들과 아이들을 조 후보와 딸이 물먹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들을 물먹인 것은 조 후보와 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반민주적이고 계급적인 대학 입학 제도다.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아이들 가운데 극소수에게만 사실상의 ‘시민 계급’을 허락하는 이 바늘귀 같은 제도가 대한민국 부모와 아이들 모두를 물먹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가장 긴 시간 공부하고, 가장 우수한 성적을 내는 아이들 대다수를 바보, 천치, 멍청이, 낙오자, 실패자, 패배자, 루저로 만들기 때문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을 위주로 한 현재의 대입 제도가 대학 입학생을 다양화했다거나, 학생들 간의 경쟁을 완화했다거나, 빈부 학생 간의 격차를 개선했다거나, 지방 학생을 우대했다는 헛소리는 이제 집어치우자. 이제껏 대한민국에 존재한 모든 대입 제도는 실패했다. 왜냐하면 열심히 공부한, 우수한 아이들 대다수를 실패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아이들은 전혀 실패한 것이 아닌데, 사회가, 정부가, 교육부가, 대입 제도가 그들을 실패자로 낙인찍고, 탈락시키고, 차별하고, 무시해왔다.

이제 이런 반민주적이고 계급적인 대입 제도를 없애야 한다. 일등부터 꼴등까지 한 줄로 등수를 매기는, 극단적으로 경쟁적인 대입 제도를 없애야 한다. 스무살도 안 된 아이들의 이마에 ‘계급’ 낙인을 찍는 대입 제도를 없애야 한다. 한번 정해진 이 ‘계급’의 변동을 사실상 허용하지 않는 대입 제도를 없애야 한다. 이게 바로 1968년 혁명 때 프랑스에서 한 일이다.

그래서 제안한다. 대입 전형을 합격-불합격만을 가리는 ‘대학입학자격시험’으로 단순화하자. 내신도 학교 수업 참여도만을 평가하는 내용으로 바꾸자. 그러면 모든 아이들이 책을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정치·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스포츠·여행을 즐기고, 친구를 사귀고, 쉴 수 있다. 학원에 갈 필요가 없다.

그리고 대학이 아니라, 아이들을 ‘갑’으로 만들어주자. 대학이 아이들을 골라 뽑는 것이 아니라, 대입자격시험을 통과한 모든 아이들이 자유롭게 전국의 대학을 골라 지원할 수 있게 하자. 지원자가 정원의 100% 이상이면 추첨으로 선발하자. 성적과 배경 좋은 아이들을 뽑는 데만 혈안이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키우는 일은 우습게 생각하는, 엉터리 명문 대학들의 기득권을 무너뜨리자. 그래서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간 뒤에 경쟁하게 하고, 전국의 대학이 서로 경쟁하게 하자.

이렇게 하려면 전국의 40여개 국공립 대학을 통합해 운영하고, 좋은 사립 대학까지 포함하는 ‘대학통합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한다. 또 최고 국립대인 서울대의 15개 단과대와 11개 전문대학원도 모두 개별 대학으로 독립시켜 전국으로 분산해야 한다. 애초 서울대는 서울의 10개 대학을 미 군정이 강제로 통합해 만든 ‘억지춘향’ 국립 대학이다.

이렇게 대입 제도를 바꾸면 가장 걱정해야 할 일은 대입자격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아이들이다. 이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 이 제도 도입 뒤의 가장 중대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들을 위해선 전문적인 직업 교육과 대학 졸업자와 차이가 없는 임금을 제공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스스로 공약한 자율형사립고 폐지조차 못하는 문재인 정부에 이런 근본적인 대입 제도 개혁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조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계급’ 문제이고, 이를 개혁하는 일이 오늘 우리 앞에 놓인 거대한 과제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오늘, 이런 제안이라도 해야, 내일, 이 미친 사회가 조금이라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ch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