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청와대 앞 들머리에서 농성하고 있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수납원 노조 간부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른 노조에서 저녁식사를 제공하겠다고 했는데 그 시간에 폭우가 예보돼 있으니 노동자 350명이 비를 피할 장소를 학교에서 마련해줄 수 없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내용이었다. “비만 들이치지 않는 곳이면 된다. 숙박까지 가능하면 더 좋겠지만 저녁시간 동안만 머물 수 있어도 괜찮다”고 했다. 이런 일이 생각처럼 쉽게 이뤄지지 않는 곳이 학교다.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지 염려도 해야 하고, 노동 문제를 가르치는 교수로서는 직원들에게 초과 노동을 요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번 알아보겠지만 숙박까지는 어려울 것 같다”고 답했다. 학교 총괄부서의 최고 책임자가 사정을 듣고 흔쾌히 동의했다. 중간에서 도움을 준 직원의 말로는 “10년 세월 동안 ‘노숙인’을 돕는 일을 하셨던 신부님이어서 갈 곳 없는 사람들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실 것”이라더니 역시 그랬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대학원 수업이 있는 날이어서 대학원생들과 함께 농성 노동자들을 방문해 대화하는 방식의 수업을 진행해도 좋을 것 같아서 야무진 현장 수업 계획도 미리 짜두었다. 노조 간부가 다시 연락을 하더니 “숙박까지 가능한 다른 장소를 구했다”고 했다. 조금 아쉽기도 하고 솔직히 큰 짐을 벗은 것 같기도 하고 “숙박은 어렵다”고 예단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고, 느낌이 좀 묘했다. 톨게이트 수납원들은 본래 한국도로공사에 직접고용된 노동자들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공공기관 선진화 방안’에 따라 2009년부터 용역업체 소속 비정규직으로 전환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다시 직접고용되는 것은 대단한 특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원상회복되는 것에 불과하다. 짐작하겠지만 용역업체 사장들은 대부분 퇴직한 도로공사 직원들이 맡아왔다. 수납원들이 2013년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등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고 1심, 2심에서 거듭 승소 판결을 받자 도로공사는 법원의 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굳이 자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6500여명의 수납원 중 5천여명이 자회사로 옮겼다. 자회사로 옮긴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 등의 혜택을 받았고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수납원 1500여명은 해고됐다. 해고된 1500여명 중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은 노동자는 300여명이다. 끝까지 직접고용을 요구하다가 해고된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도로공사는 그나마 무늬만 ‘자회사 정규직’이라는 방식도 제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임금 인상 등의 혜택을 제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회사가 대법원 판결조차 이행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010년 대법원 판결 이래 모두 11번이나 정규직 지위를 인정받는 판결을 받았다. 그동안 받지 못한 정규직 임금과의 차액을 지급하라는 판결도 받았다. 회사는 지금까지 차별받은 불이익에 대한 보상은 포기하고 정규직 ‘신규 채용’에 응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과거 불이익에 대한 보상과 함께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갈라치기했다. 고용노동부 장관의 자문기구인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가 지난해 8월 현대·기아차에 대한 직접고용 시정명령을 권고했으나 아직 이행되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고용부는 직접생산공정과 간접생산공정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갈라치려 하고 있다. 과거 정부에서조차 없던 일이다. 김수억 기아자동차 비정규직지회장이 40일 넘게 곡기를 끊고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도로공사는 자회사로 옮긴 노동자 5천여명과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노동자 1500여명을 갈라치기했다. 앞으로는 해고된 1500여명 중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은 노동자 300여명과 그렇지 않은 노동자를 갈라치기할 것이다. 지금까지 받은 불이익은 불문에 부치고 ‘정규직 신규 채용’에 응하는 노동자들과, 과거 불이익에 대한 보상과 함께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을 갈라치기할 것이다. 이 우울한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으면 좋으련만 지난 9일 도로공사 사장의 발표를 보니 결국 그렇게 하겠다는 의중이 읽힌다. “1500명 집단 해고 청와대가 책임져라”는 농성장 구호를 보고 “왜 대통령에게 시비를 거냐?”고 못마땅해하는 시민도 있지만 학창 시절 정치사상사를 담당한 은사님은 “두메산골에서 노파가 굶어 죽어도 대통령이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라고 가르쳤다. 톨게이트 수납원 노동자들이 청와대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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