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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계엄령의 ‘추억’ / 신승근

등록 2019-10-23 19:13수정 2019-10-24 09:44

헌법 제77조는 ‘대통령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병력으로써 군사상의 필요에 응하거나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은 동시에 국회가 재적 의원 과반수 찬성으로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이를 해제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계엄사령관 등 군에 이관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까지 제한하는 계엄의 위험성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견제 장치는 유명무실하다.

1948년 8월15일 정부 출범 두달여 뒤인 10월21일 계엄이 처음 선포됐다. 제주도에서 발생한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한 여수·순천 지역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해 7월17일 공표한 제헌헌법 제64조에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고 명시했지만, 정부는 미처 계엄법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의 계엄법을 준용해 먼저 계엄을 선포하고, 이듬해인 1949년 11월24일 계엄법을 제정했다.

이후 계엄은 번번이 탄압 수단으로 악용됐다. 1950년 제2대 총선에서 야당이 다수를 차지하자 국회에서 치러지는 간접선거로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이 관제데모를 부추기고, 그 혼란을 빌미로 계엄을 선포해 야당 의원들을 투옥하고 직선제 개헌을 강행한 1952년 ‘발췌개헌’이 대표적이다. 1961년 5·16 쿠데타, 1963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1972년 10월유신 선포, 1980년 5·18 광주민주항쟁을 부른 신군부의 계엄 전국 확대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헌법엔 ‘국회의 계엄해제권’이, 계엄법엔 ‘국회의원 불체포’ 규정이 있지만 휴짓조각이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탱크로 국회를 봉쇄하고, 항의하는 의원은 계엄법 위반으로 체포 구금했다. 1980년 5월17일 전국 계엄확대 이후 신군부가 야당 의원을 체포하고,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민주인사들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조작과 계엄법 위반 협의로 체포·투옥한 흑역사가 이를 명백히 증거한다.

1960년 4·19혁명 발생 직후의 계엄령만 예외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격화한 시위에 맞서 계엄을 선포하고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에 임명했지만 그는 군에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면서 되레 혁명 성공에 일조했다.

해외에도 유사한 사례가 무궁무진하다. 대만은 1947년 타이베이시 한 빌딩에서 정부가 독점한 담배를 파는 노점상 할머니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시민과 경찰이 충돌하는 ‘2·28사건’을 빌미로 계엄령을 선포한 뒤 1987년까지 무려 40년 동안 계엄을 유지했다. 1932년 지금까지 20차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태국에선 군의 힘이 막강해 군이 독자적으로 전쟁, 폭동 발생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한다. ‘반중국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홍콩에선 계엄령 선포 가능성이 계속 거론되면서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을 앞둔 2017년 3월 당시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계엄 검토 문건’이 새삼 공포스러운 계엄령의 ‘추억’을 되살리고 있다.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인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문건 작성을 인지 또는 승인했는지까지 논란이 번지면서 이 문제가 법정공방으로 비화할 조짐을 보인다.

1979년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 80년 5월 광주로 이어지며 전국으로 확대됐던 계엄령이 1981년 1월24일 자정에 해제된 이후 ‘계엄령 없는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40년 가까이 이어온 이 전통을 누구도 훼손하거나 끊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신승근 논설위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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