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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경식 칼럼] 태풍 19호

등록 2019-10-24 16:35수정 2019-10-25 14:12

기상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이런 재해는 점점 더 거세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내가 느끼는 위협은 자연재해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야비하고 차별적인 인간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도쿄 상업지구에서 수십년간 근면하게 살아가고 있는, 저 사람 좋은 ㄱ씨 일가는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

간만에 오랜 벗인 ㄱ씨가 전화를 했다. “괜찮아? 도와주러 갈까?” 아무래도 태풍 19호(하기비스)로 인한 수해를 걱정해서 연락한 모양이다. 정말 그다운 친절한 제의지만 지금 내게는 필요가 없어 정중하게 사양했다.

나는 최근 몇년간 생활의 태반을 나가노현의 한 지방에서 보내고 있다. 원고 쓰는 일은 주로 그곳에서 한다. 태풍 19호는 일본 전국에 맹위를 떨쳤는데, 나가노현에도 큰 피해를 안겼다. 내가 사는 중부지방에도 피해가 있었지만 나가노현의 피해는 북부지방에 집중됐다. 호쿠리쿠 신칸센 차량기지가 수몰된 영상을 본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ㄱ씨도 그런 뉴스를 보고 염려해준 것이다. 그로부터 한주가 지났는데 아직 복구는 멀고 행방불명자 수색도 계속되고 있다.

ㄱ씨는 도쿄도 내에서 불고깃집을 경영하는 재일동포다. 지식욕이 왕성하고 정치에 관해서도 확실한 자신의 의견을 지니고 있다. 젊은 시절엔 재일동포계의 작은 신문사에서 일을 했는데, 그걸로는 생활이 안 돼 불고깃집을 시작했다. 제주도 출신의 안주인은 부지런한 사람으로 성격도 밝고 요리 솜씨는 일품이다. 근면하고 정직한 서민이다.

태풍 19호는 일본에 접근하기 한참 전부터 매우 맹렬한 기세라고 해서 경계하고 있었다. 한달 전쯤 태풍 15호로 큰 피해가 났고 아직 부서진 가옥 수리에 손도 대지 못한 상태였다. 19호는 15호보다 훨씬 더 세력이 강해서 ‘관측사상 최고의’ 또는 ‘미증유의’ 같은 형용이 어지럽게 붙었으며, “즉시 목숨을 지킬 행동에 나서라”는 경고가 계속 흘러나왔다. 피해의 전모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으나 완전 복구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나와 아내는 태풍이 덮친 밤을 나가노현 집에서 큰 빗소리를 숨죽여 들으며 불안 속에 보냈다. 실은 지난해에도 강한 태풍에 직격당해 이웃집 큰 나무가 우리 집 쪽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지붕이 부서졌다. 오래 살았지만 그런 경험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꽤 많은 비용을 들여 그 지붕 수리가 끝난 지 몇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 15일 차를 몰고 도쿄로 향했다. 그런데 고속도로는 토사 붕괴로 통행 불능이 돼 복구에 1주일 이상 걸린다고 했다. 철도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고속도로로 갈 수 있는 데까지 간 뒤 일반 국도로 갈 작정이었으나 그것도 여기저기 통행 불능이어서 좁은 고갯길을 더듬어 갔다. 여느 때의 두배 정도 시간이 걸렸던 것은 예상밖 행운이었다.

태풍이 많은 일본에서 70년 가까이 살아온 나의 체감으로도 분명히 최근 몇년 새 태풍이나 호우 피해가 더 늘었다. 그 큰 원인은 지구 온난화, 특히 해수온도 상승에 있다고 한다.

“당신들이 얘기하고 있는 것은 오직 돈과, 경제발전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라는 옛날이야기뿐이다. 부끄럽지 않은가요!” 9월23일 유엔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 연설은 세계에 충격을 주어 많은 사람들(특히 청년층)이 호응해서 거리로 나와 호소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현대 세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그레타양에게 얘기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그녀는 밝고 멋진 미래를 바라보는 정말 운 좋은 소녀 같다. 정말 기쁘다”고 트위트로 야유했다.

석탄화력발전소를 증설하려는 일본에서는 전반적으로 관심이 희박하고 냉소적 반응도 눈에 띈다. “16살짜리의 생각에 세계가 휘둘려선 안 된다” “세뇌당한 아이”라는 식이다. 인터넷에선 “정신적으로 앓고 있다”고 한 분별없는 비난도 있는데, 정말 “앓고 있는” 건 누구인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할 자는 누구인가? 나는 부끄럽다. 지구환경 문제에 이렇다 할 공헌도 할 수 없는 나, 그리고 이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른들이 활보하고 다니게 만든 무기력한 나 자신이.

태풍 19호와 관련해 두가지 얘기해 두고 싶은 뉴스가 있다. 하나는 태풍이 한창 맹위를 떨치던 지난 12일, 도쿄도 다이토구가 설치한 피난소로 대피하려던 노숙자 2명이 입소를 거부당한 뉴스다. 피난소 입구에서 직원이 이름과 주소를 쓰라고 하자 노숙자 남성은 사실대로 “주소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피난소는 구의 주민만 이용할 수 있으며 주소불명자는 안 된다고 답변했다. 이에 대해 나중에 시민단체 등이 항의했으나, 일반인 중에서는 “세금도 내지 않았는데”라는 소리도 나왔다. 어느 예능인은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평소 지붕 없는 곳에서 살았는데, 재난 때만 지붕 밑으로 가겠다는 건 불공평하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서민의 도덕관을 ‘허울 좋은 겉치레’ ‘위선’이라며 조소하는 나쁜 풍조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누구나 성인이 아닌 이상 좁은 공간에 옷차림도 불결한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내심 곤혹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본심을 부끄러움도 없이 노골적으로 얘기하는 것, 그렇게 해서 방관자들로부터 갈채를 받고 흡족해하는 것은 전혀 별개다. 그런 본심을 자제하고 그 약자를 불러들여 물 한잔, 컵라면 하나라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그런 자신을 부끄럽게 여길 수는 없는 것일까. 이처럼 인륜의 기본이 무너져버린 추한 사회를 보는 것은 정말이지 우울하다.

또 하나는, 태풍 19호가 지나간 뒤인 14일, 도쿄도 히노시의 다마가와 하천 부지에서 노숙생활자로 보이는 남성의 주검이 발견됐는데, 18일 현재 이번 태풍 재해로 인한 도쿄도 내 유일한 사망자로 보인다는 뉴스였다(<마이니치신문> 10월19일). 피해 통계 수치에는 그냥 1로만 기입될 그 사망자는 호우 때문에 탁류로 변한 강 한가운데의 모래톱에서 지붕도 우산도 없이 상의도 입지 못한 상태로 익사했다.

나는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생각한다. 그 피난소에서 이름·주소를 쓰라고 요구받은 사람이 외국인이었다면 어떠했을가? 일본인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이름, 더듬거리는 일본어, 주소도 불확실한 사람이었다면? 내 우울한 상상은 1923년 간토(관동) 대지진 때 자경단이 불러 세우고 발음하기 어려운 ‘15엔 50전’이라는 말을 하게 해서 제대로 발음하지 못할 경우 학살당한 조선인과 중국인의 비극으로 향한다.

기상 전문가들은 앞으로도 이런 재해는 점점 더 거세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내가 느끼는 위협은 자연재해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야비하고 차별적인 인간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도쿄 상업지구에서 수십년간 근면하게 살아가고 있는, 저 사람 좋은 ㄱ씨 일가는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걱정은 기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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