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치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이번주에는 혁명에 대한 권고를 읽었다.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발간한 ‘4차 산업혁명 대정부 권고안’이다. 칭송을 받든 비판을 받든, 국가 위원회가 내어놓은 주요 문서가 꼼꼼한 독해와 토론의 대상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으로 권고안 파일을 내려받았다.
장병규 위원장은 발간사에서 “변화는 항상 괴롭고 힘듭니다. 하지만 우리가 변화하지 않는다면 결국 변화를 강요당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권고안 자체가 국민에게 변화를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변화의 속력과 방향에 대한 문제제기는 불필요한 ‘저항’으로 여겨진다. 대세를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는 분위기는 맺음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우리는 이미 4차 산업혁명이라는 변혁의 시대에 살고 있고, 새롭게 거듭나지 않으면 글로벌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4차 산업혁명 대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다.” 이 혁명의 가장 큰 동력은 불안과 두려움인 것처럼 보인다.
권고문은 중국 칭화대 국정연구원장 후안강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는 비장한 마음을 표현한 문구다. “중국은 지난 200여년의 세계 산업화, 현대화의 역사 속에서 3차례의 산업혁명 기회를 놓쳤다. 3차례에 걸친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중국은 변경국, 낙오국, 낙후국이었고….” (후안강이 “중국 지도부의 입맛에 맞는 국가발전 전략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관변학자”(<연합뉴스> 2018년 8월)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걸 고려하면 의외의 선택이다.) 한국은 중국의 전철을 밟지 말고 이번 기회에 앞서 나가야 한다는 의지는 맺음말에 재차 드러난다. “퍼스트 무버가 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문이 점점 닫히고 있다. 고작 수년이 남았다. 지난 200여년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바뀌어야 했다면, 이제는 스스로 바꿀 시기이다.” 1990년대 한국에서 유행했던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라는 구호도 떠오른다. 혁명은 늘 다급하다.
‘4차 산업혁명 대정부 권고안’의 큰 장점은 그 입장의 선명함이다. 공적으로 제시된 선명한 입장은 토론을 유발한다. 위원회는 국민의 요구를 이렇게 해석한다. “지금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명확하다.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통해 나와 내 자식 세대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고통을 분담하자는 것이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의 철학은 ‘고통 분담’이 아니라 ‘성장’이며, 성장에 따르는 고통은 마땅히 감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한 황선자 위원의 외로운 반론은 세개의 각주로만 남았다.
이런 점에서 4차 산업혁명은 그 이전의 산업혁명과 질적으로 별로 다르지 않다. 과거 산업혁명을 뒷받침했던 인간과 지구의 일방적 관계에 대한 인식은 21세기 기후위기의 현실 앞에서 이미 무너졌지만, 4차 산업혁명의 ‘성장’ 담론은 과거의 그 지구를 여전히 붙들고 있다. 지구를 인류 문명의 성장을 위한 자원의 무한 제공처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산업을 융성하게 만들겠다는 의지에 눌려, 파국의 위기에 처한 지구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권고는 어디에서도 나오지 못하고 있다.
성장과 번영에 대한 열망은 산업혁명의 현장에서 쓰러져가는 사람의 절망 또한 압도한다.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인재’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자’, 특히 배달 오토바이를 타다가 죽는 플랫폼 노동자, 기계에 끼여서 죽는 제조업 노동자는 혁명의 주요 의제가 되지 못했다. 권고안에 쓰인 10여장의 사진 중 산업혁명 현장의 실제 모습을 담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델을 써서 평화로운 삶의 장면을 연출했거나 첨단기술 미래를 상상한 이미지가 전부다. 혁명의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배제하는 것, 이 또한 4차 산업혁명이 과거의 혁명을 빼닮은 점이다.
이런 식의 불평에 대한 손쉽고 강력한 반론은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기후위기위원회나 노동안전위원회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산업혁명이라는 과업에 집중하고, 부작용과 희생은 별도로 논의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4차 산업혁명이 기후위기나 지구의 운명과도 관련이 없고, 일하는 사람이 죽고 다치는 문제와도 관련이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혁명의 열풍이 조속히 사그라들고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새로이 도래하기를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다.